청마 유치환 선생은 내 중학교 시절의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다. 내고향 안의는 지리산 동북쪽 금호강(錦川) 냇가에 위치한 옛 안의현(安陰縣)의 현청이 있었던 고읍(古邑)이었다. 남덕유산 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과 거망산 황석산을 이루고, 그 밑으로 화림동 심진동의 풍치 좋고 그윽한 골짜기가 어머님 품처럼 이 고장 사람들을 보듬어 안아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곳이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 피바위에서 산화한 애국충민이 있었고 지성을 갈아 선진 의식을 번득인 한국 애너키스트의 본원지라고도 한다. 후진을 계도 교육하려는 교육열이 드높아 지역민들이 재정을 추렴하여 사립중학교를 신설하였으니 해방 후 사립중학교 신설 1호를 기록한 곳이기도 하다.
청마 유치환 선생이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것은 한국전쟁이 휴전을 앞둔 1952년 이른 봄이었다. 내 나이 열 다섯,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새로 훌륭한 교장 선생님을 모셨다는 소문에 뒤이어 전교생을 모아 첫 부임인사를 하는 아침 조례 시간이다.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라면 응당 여러 사람들 앞에서 위세도 당당하고 연설도 잘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 학생들의 통념이었다.
새로 모신 교장 선생님이, 일본의 애너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작품을 읽어 감동을 받았고 허무와 이상적 본향을 동경하는 '깃발'이라는 낭만적 시를 썼으며 범신론적 자연애로 통하는 생명애(生命愛)의 열애를 바탕으로 한 인생파 시인이라는 것을 그 때까지만 해도 알 까닭이 없었으며, 어른들 세계에서나 알았을 법한 너그럽고 관대한 인품, 호탕한 웃음, 꿋꿋한 내적 의지의 소유자이며 두주급의 술꾼이라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부임 인사를 듣겠답시고 도열한 우리들은 전례에 따른 그 당당한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을 기대하였지만 첫 말문을 성급히 열어제끼는 것이 아니었다. 키가 작아 비교적 대열의 앞줄에 서서 단상을 치올려다 보아야만 하는 내 눈길에는 청마 선생의 고바우처럼 생긴 안경 낀 큰 얼굴이 아니라 하반신이 유독 더 잘 보이었다. 말문을 선뜻 열어 말씀하시지도 않는 데다가 공교롭게도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서 발표를 하라고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할 말을 잊어버리던 것이 내 어린 시절의 컴플렉스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괜스레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 교장 선생님도 그런 류의 사람이구나 싶으니 존경심이 사라졌다. 가까스로 꺼내어 놓은 말씀도 지나친 눌변이로구나 싶었다.
그런 유치환 교장 선생님을 재발견 한 것은 그 후 특별 수업 시간이었다. 담당 국어 선생님의 유고로 수업 결손을 충당하기 위하여 교장인 청마 선생이 대리 수업을 했던 것이다. 우리반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수업은 어떤 수업일까 하고 별난 호기심으로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 중에서 내가 인상 깊게 포착한 수업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청마 선생은 칠판에다가 먼저 관(棺)이라고 하시면서 한 쪽 다리가 놓일 자리가 없는 관을 그리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얘들아! 서양 사람들은 한 쪽 다리가 없는 사람이 죽으면 이런 관을 짠다고 한다. 한쪽 다리가 없으니 없는 쪽 다리의 관 자리까지 짤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것이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란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그런 관을 어느 누가 어찌 짜겠느냐. 살아 생전에도 한 쪽 다리가 없었던 그는 얼마나 한스럽고 수치스러웠겠는가. 하물며 죽음 길에서도 병신이라고 구별하여 관을 짠다면 그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서양을 배우고 서양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다지만 동양의 정신적 사고방식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이 아니겠느냐? 대충 이런 내용의 말씀이셨다.
전쟁으로 교실을 잃고, 미군 군용 텐트에서의 수업이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려 천막에다가 물을 담아붓고 있던 1952년 여름날의 이야기다. 동양적 정신세계를 잘 인식하라는 한낱 비유적인 이야기였겠지만 그러한 청마 선생님의 말씀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시인으로서 유치환 교장 선생님을 내가 인식하게 된 것은 1958년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2학년 때였다. 지금은 아동문학 평론의 원로이신 이재철 교수님의 현대시 강의를 수강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나에게 맡겨진 과제가 청마 유치환의 시 세계였다. 어찌보면 그것은 청마 선생님과 나와의 두 번째의 운명적인 만남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유치환의 시 세계를 '春信(봄소식)'과 '깃발'을 중심으로 하여 내 나름대로 감상하고 리포트로 발표했다. 굴(屈)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시인, 인생의 허무를 통찰한 인생 탐구의 시인, 암흑 세계를 가장 빨리 감수한 비창파(悲滄派) 시인, 이지와 감정을 평형지어 겸전한 시인이란 것을 중심으로 한, 이론에 곁들여 시감상을 적었다.
내가 감상한 '春信'은 이런 것이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적 현상은 신비롭고 경이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칩거(蟄居)로부터의 생동(生動)을 의미하고 보면 가슴 벅찬 환희요 생명의 개가(凱歌). 봄을 환호하는 소박한 멧새와 조촐한 살구나무, 추위와 굶주림으로 긴 겨울을 작은 보금자리 속에서 다리 옹그려 떨고 있다가 따스한 봄기운이 멧새의 깃 속에 느껴졌을 때 봄을 느끼는 멧새의, 봄을 알아차린 감각은 사람의 무딘 신경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몸이 저리게 봄이 즐거워 웅크렸던 날갯죽지를 펴고 훨훨 날아 찾아간 곳이 철 따라 핀 한 그루 살구꽃 나무였을 것이다. 이른 봄소식으로야 울밑 개나리에 종종종 병아리떼가 좋지만 그것보다도 첫눈에 화안한 살구꽃 그늘에 시골뜨기같은 멧새가 날아와 봄을 즐긴다면 한 걸음 더 봄을 가까이 느낄 것이었다. 누구도 모르게 한들거리는 살구꽃 나무는 작은 멧새와 더불어 즐겁다.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작은 길은 멧새가 지나간 꿈의 길이다"
이런 내용으로 적어 발표한 리포트를 보고 이재철 교수는 너무 잘했다 싶었던지 베낀 것 아니냐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깃발'에 대한 감상은 이렇게 적었다.
"마스터 위에 나부끼는 깃발은 시인의 젊은 이념이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은 해풍에 펄럭이는 돛대 위의 깃발이며 또한 그 깃발은 청춘의 정열이요 인생에 대한 이상이다. 만만치 않은 현실 속에서 맑게 살아가려는 이념과 순정은 차라리 애달픔이었을지도 모른다.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누군가' 하고 노래한 것은 애달파하는 작자의 심정 표백일 것이다."
그런 청마 선생은 나의 중학교 졸업사진 앨범에 모습을 드러내고선 경북대학교 시간 강사로, 경주고등학교의 교장을 거쳐 부산의 경남여고, 남여자상고 교장으로 교육계를 편력하시다가 부산에서 돌아가신 것을 나는 경남북 일대를 떠돌던 중고등학교 교사 시절에 알았다.
그분께서 산간 벽지 안의중학교에 발을 디디셨던 연고는 세상을 알고 나서 보아하니 시대의 흐름을 좇아 살아온 결과였던게 아닌가 싶다. 6.25 한국전쟁을 만나 문충구국대로 국군 3사단에 종군하여 원산, 함흥 전선까지 진출하였던 청마 선생은 심신의 피난처로 安義行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1954년 3월 우리들이 금호강가의 돌을 날라 신축한 가교사를 배경으로 하여 찍은 낡은 졸업사진 한 장을 내놓고, 120명 졸업생들의 검은 학생복 사이에 유독 하얀 한복 두루막 차림으로 의연하게 정좌하신 청마 선생을 회상하며 이 글을 쓴다.
(2003. 2. 14. 여강 김재환 선생 산문집 <如岡散藁>에서. -도서출판 비움-)
春信(봄소식)
꽃등인 양 창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깃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의 푯(標)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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