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如岡園 시절 그 후

如岡園 2007. 5. 5. 02:44

 2006년 3월 말일 밤, 그 동안 여강원을 즐겨 찾던 교수, 대학원 학생, 제자들을 모아 여강원에서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시를 고별사 대신 낭송한 것을 끝으로 나는 여강원을 떠나 쌀, 도자기, 산수유, 복숭아, 인삼의 고장인 경기도 이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늙으면 고향땅으로 가서 전원생활을 하려던 젊은 시절의 꿈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의 이주였다. 이제는 늙으면 자식들이 있는 곳이 고향이 되고마는 현실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래는 불확실한 것, 그래서 미래의 설계는 성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부터 이리저리 모색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그 때에 가서 그 때가 가져다 주는 무엇이든지 그것이 선물인 양 받아주는 것이 인생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것이 내가 만년에 깨달은 진리가 되고 말았다.

 영혼은 고향을 떠나 불안에 떨고, 미래의 생활에 생각을 달리며 마음을 쉬게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쓸쓸한 듯이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겁내지 않고 씩씩한 용기를 갖고 그림자 같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고 여강원을 떠났다.

 잠자리가 되는 생활공간은 작아도 상관없지만 정원 텃밭이 없으면 질식할 것 같았던 기존의 관념을 깨고 세상의 흐름을  좇아 늘그막에 난생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괴물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평생을 가지고 다녔던 가재도구며 생활 용품을 고스란히 옮겨 정돈해 놓고 보니 낯설지 않아서 좋다. 항상 좁은 집에서만 살아 서재라기보다는 서고라는 개념에 걸맞을 수밖에 없도록 평생을 가지고 다녔던 책들도 버릴 것은 버리고 후진에게 넘겨줄 것은 주어도 남아 있는 책들을 정리하여 서재답게 꾸미고 들어앉으니 이제 새삼스레 교수의 방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뒷북치기 밖에 안된다는 생각에 실소를 머금었다.

 생면부지의 고장에 와서 새삼 낯선 사람을 끌어 사귀어 어지러운 세상을 개탄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한가롭게 된 고향 친구들이 서울 바닥에 널려 있어 무시로 불러내어 먹고 놀기에 바쁘다면 바쁘다.

 취향에 따라 고궁을 두루 재섭렵하고, 자그마한 개울 하나 되살려 놓고 천지개벽이라도 일구어낸 듯 떠들어대는 청계천변도 여러 차례 둘러보았고, 종묘 앞 시민공원의 하릴없는 노령의 인간군상에 질겁을 하기도 했다.

 여남은 시간은 눈이 모자라게 펼쳐 있는 너른 들녘이나 주변의 마을을 탐사하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트랙트를 운행하게 잘 정비된 농로를 따라, 운동 겸 전원풍경을 완상하는 좋은 방법이 싸이클링이었다. 하루 평균 12킬로를 주행한 거리를 따져봐도 여기서 부산까지 서너번을 왕복한 것이 된다.

 자원방래(自遠方來)하는 벗이 없고 굳이 부르고 싶지도 않았으니, 서실에 웅크려 앉아 소일을 하는 시간도 많지만 회구(懷舊)의 정으로만 치달아 못마땅하다. 미련없이 버리고 앞만 보고 살자. 불확실한 미래에 호기심을 가지고 성장하는 세대에 눈을 돌리자.

 이런 대책으로 뛰어들었던 게 인터넷의 세계였다. 컴맹 세대 그 중에서도 한참 위가 되어버린 망령의 나이로 블로그를 열었다.

 나라의 수장(首長)도 컴퓨터 앞에 앉아 이마에 주름잡고 눈을 찡긋거려야 그럴싸한 정책을 펴는구나 싶은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책이나 들여다 보고 탕국냄새 나는 소리나 지꺼려서야 되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자호 '여강(如岡)'을 블로그 이름으로 내걸고 '如岡園'을 닉으로 하여 내가 좋아하는 사진, 영화, 음악, 수필을 중심으로 한 내용을 블로그에 싣고, 같은 취향의 블로그를 찾아다녔다. 그야말로 천태만상, 무한대의 열린 공간! 혐오감도 들고 쾌재도 하고 두려움도 느꼈다. 내가 올리는 글에 대한 책임도 져야 되고 남의 것을 따왔으면 예의도 차려야 된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내 것을 드러내어 보인다는 생각보다 타인의 블로그에 올려 있는 글을 통해 안목이나 넓히자고 배우고 감상하고 소일하는 것으로만 작정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것도 없이 남의 것만 들여다 보는 것은 파렴치한 행위가 되고 나이깨나 든 사람이 주책스럽기도 한 것이다.

 개성 있는 나의 블로그 세계를 구축하여 손님을 맞이하여야 되고, 오는 손님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내용도 문제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내 블로그를 방문하는 손님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의무 쪽이 기본 예의였던 것이다.

 일상을 단편적으로 말한다면 모르지만 수시로 새로운 글을 써서 올린다는 게 여간한 일거리가 아니어서, 우선 기존에 발표한 글들을 어레인지하거나 리모델링하여 올리기로 작정을 하고 카테고리를 설정하였다. 

 여강의 사진, 여강의 글(A), (B), 교양명언, 고사숙어, 세시풍속, 사진 음악 영화, 여행낙수 등으로 카테고리를 정하여, 누가 와서 보거나 말거나 격일로 글을 실었다. 시라면 또 몰라도 너주리한 줄글을 읽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내 글을 읽어줄 네티즌이 몇이나 있으랴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런 게 아니어서 꽤나 방문객이 많은 날은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교양명언은 국립사범대학을 졸업하고도 병역미필로 교사 발령을 못받고 실의의 귀향길에서 사들고 갔던 1961년 당시 HLKA에서 연속방송으로 송출한 내용을 삼중당에서 책으로 펴낸 동서교양명언집 <마음의 샘터> 중, 내가 다시 취사선택 편집을 하여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정작 그 시절에는 마음깊이 새기지 못했던 명언들이 세상을 살대로 살아 온 오늘에 이르러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나이 탓이리라.

 음악 사진 영화는 그 방면에 조예가 깊은 블로그들이 올린 여러 내용 중에서 내 취향에 맞는 것으로 골라 스크랩하여 수록하곤 한다. 어쭙잖은 재주로 사진을 찍고 음악을 찾아 실어도 그 방면의 전문가를 따라잡기가 불가능해서이다.

 섣불리 신분을 노출시켜 심리적 부담을 짊어질 필요도 없는 세계이다. 멋모르고 프로필을 상세화 하였다가  거두어 들였다. 그런 가운데도 글의 내용에 유추되어 대학 동과의 먼 후배에게 꼬리가 잡혀 학문적 정신적 교류가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신입한 만학도의 블로그와 선이 닿아 학과 강의 내용의 훈수를 들기도 하는 것이 보람스럽다.

 실린 글에 대한 반응은 많지는 않지만 하이 레벨이다. 이왕이면 지금껏 내가 쌓아 온 내 교양의 진폭을 최대화한 정수만을 가려뽑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위가 뒤틀려도 좀처럼 내색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철칙을 삼지만 딱 한번 꼬집어 주고 싶은 게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익살을 가장하여 비수를 들이댄 일이 있다. '청마 선생을 추억함'이란 내 글을 올리고 보완자료로서 어느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청마 문학관 사진을 스크랩하는 과정에서 그 블로그의 댓글을 보니 비위가 거슬리는 게 있었다. ......중략...... 이 블로그 주인은 어떤 댓글이나 답글쓰기에도 일체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내가 대신 반응을 한 것인데......중략......

 통영 청마문학관에는 청마의 이름이 적힌 내 중학교 졸업장 사본과 청마 선생이 한복을 차려입은 우리들 졸업사진이 확대 복사 전시된 것도 있고, 청마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은근히 분한 생각도 들어 '청마 유치환' 글을 올린 사람의 교감게시판에다 대고 당사자를 대신하여 뇌까렸다. 청마의 행적에 대해서 좀더 확실한 것을 알아 개똥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몽둥이질이라도 해야겠다고...

 이런 일보다는 건설적이고 희망적인 것이 훨씬 많다. 생동감 있는 화면으로, 이어령의 시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로 시작되는 <날개를 주소서>도 접하고, 1999년 콜로라도 리틀톤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사건을 목격한 제프 딕슨의 시 <우리 시대의 역설>도 읽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내 컴퓨터 화면에는 이슬라 그란트의 "He's there for me"가 맑고도 잔잔한 음성으로 흐르고 있다. 

 텃밭 대신 사이버 공간에 내 정신적 고향인 여강원을 꾸며 놓고 나의 內質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손님을 맞이하고 내가 바라고 마음이 통하는 블로그를 찾아 팔도강산은 말할 것도 없고 저 동족이 사는 연변으로, 두바이로, 뉴욕으로, 프랑크푸르트로  달려간다.

 여강원 시절이 한없이 그립지만, 내 나름대로 길을 찾아 여기 왔고 또 길을 따라 살아가련다. 그리하여 언제인가 나는 또 새로운 내 영원한 마음의 고향 여강원을 찾아 길을 떠날 것이다.    (동인지 길 7호)

 

                                                                          여   강     김   재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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