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고도 못 보는 해태 눈
서울 경복궁 자리에서는 관악산이 규봉(窺峰)이 되어 남산 너머로 보이는데, 이 산의 봉우리가 불쑥불쑥 마치 불꽃 타오르는 것 같아 보이므로 이 화기를 누르기 위해 바다 짐승인 해태를 해 앉혀 그것을 향해 노려 보고 있게 함으로써 화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럴싸한 얘기이다.
그러나 해태란 그렇게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 시험삼아 불교의 절엘 가 보라. 그 저승을 그린 그림에서 염라대왕은 특이한 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이것이 해태관이라는 관이다. 해태란 사람의 마음의 곧고 굽음을 감별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짐승이므로 이것을 상징화하여 법관(法官)의 관(冠)으로도 삼고 있다.
그러니까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고 그 정문인 광화문 양 곁에 해태를 해 앉힌 뜻은 앞에서 얘기한 관악산의 화기를 막는 얘기와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뱃속 검고 마음 굽은 고약한 놈은 들어오지 말라고. 그러나 그 속을 드나드는 탐관오리는 늘어만 가고...
그래, 그 연유를 아는 백성들은 이런 말을 만들어 냈다. "뜨고도 못 보는 해태 눈깔!".
지금도 해태는 그 큰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다. 드나드는 인사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 들여다 보는 듯하다.
'해태'를 어느 제과업체의 상표 쯤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에서, 그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만한 얘기다.
# 나 먹을 것은 없군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만든 이지함은 한산 이씨로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 삼촌이다.
그는 항해술에 남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어 바다 다니기를 육지처럼 하였다 하며, 또 전도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어 세상에서 이인(異人) 소리를 듣는 분이다.
그가 남다른 재주와 포부를 갖고도, 또 시쳇말로 비할 데 없는 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뒤늦게 경기도의 포천 현감이라는 미관 말직에 취임했을 때의 일이다.
모두들 대신의 숙부시라고 특별히 마음을 써서 산촌 읍 치고는 최고로 밥상을 차려다 놓고 잡숫기를 권했더니 그가 상을 한 번 휘둘러 보고 나서, "먹을 게 없군!" 한다.
모두 황송해서 상을 물려, 전 보다 더 호화롭게 차려다 올렸더니 젓가락을 집지도 않고 또, "나 먹을 건 없군!" 한다.
모두 도리가 없어 마당에 거적을 깔고 죄 주기를 청했더니(석고대죄:席藁待罪),
"너희 고을에서는 산채가 많이 날 것이 아니냐? 그 산채로 된장국을 끓이고 밥은 오곡잡곡밥으로 지어서 한 그릇 수북히 담아 오너라. 나는 그것이라야 먹느니라."
그리하여 재임기간 계속 이런 식사로 일관하였다 한다.
또 여행을 즐기어, '새옹'이라고 하는 놋쇠로 만든 조그만 솥을 갓삼아 쓰고 다니다가 경치가 좋은 곳이 있으면 벗어서 닦아 밥을 지어 먹고 다녔다고도 한다.
요즘 세상에도 어울리지 않게 수염 길러 한복 차려 입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고, 보릿대 모자 쓰고 농삿군연하는 사람도 있으니 異人이라고 해서 별건 아니지만 어쩐지, 낡았다는 역사 속 대쪽같은 선비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쓴웃음이 머금어진다.
# 나는 언제나 급제를 하노?
옛법에 고관 대작에 있던 사람이 반대당의 탄핵을 받든지 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더라도 과거에 급제한 것만은 말하자면 학위라, 대외적으로 급제로 호칭하는 법이었다.
임란 때의 공신이요 또 해학가로서 많은 일화를 남긴 백사 이항복은,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 때 중신의 위치에 있었으나, 날로 글러만 가는 조정 처사에 울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옛 동료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상소를 올렸다가는 차례로 관직을 삭탈 당하는 판국인데, 그런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바로 '나는 언제나 급제를 하노?' 였다는 것이다. "나는 머지 않아 그대들의 뒤를 따라 도로 급제로 돌아갈 것이다." 하는 뜻을 비친 말이다.
벼슬하려는 선비의 등룡문인 과거급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것이라, 산전수전 다 겪은 재상으로서 이런 심각한 한 마디를 던졌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상소를 올려 벼슬을 사하고 다시 반대당에 몰려 함경도 북청에 귀양갔다가 거기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孤臣怨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준들 어떠리.
하는 그의 단가는 도성 내에 모르는 이가 없게 유행하였고, 광해군도 연회 석상에서 이 노래를 듣고는 기분이 울적하여 잔치를 파하였다고 한다.
정치판에서 놀고있는 사람들이 한번 새겨 들을 만한 이야기다.
# 칠십에 능참봉(陵參奉)을 하나 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 아홉번이라
'늙게 된서방 만났다'는 격으로 명목 없는 구실에 일만 드세다는 뜻으로들 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런 일화도 관련되어 있다.
조선왕조 후기의 정조가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수원으로 능침을 옮기고 수원성을 쌓고 행궁을 세우며,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고 뻔질나게 거동을 해서 능을 봉심(奉審)한 때문에 나온 소리다.
그는 자기 아버지 능 주위에 송충이 끓어 소나무들이 다 죽는단 얘길 듣고, 그 중 큰 놈으로 잡아올리라 해서 그 징그러운 놈을 깨물었더니, 하늘이 감동했는지 큰 비가 내려 송충이가 전멸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또 일설에는 어떤 능참봉이 신수를 보았더니, 아무 날 능상 앞에 가 엎드려 있으면 죽을 고비를 면하리라고 한다. 마침 그날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임금은 생각하였다. "이렇게 비오는 밤이면 능상이 어찌 되려나. 지키라고 둔 관원 놈은 뜻뜻한 방에서 편하게 자렷다". 그래, 군사에게 칼을 주어 달려 보냈더니 집에 안 있고 그 비를 맞으며 능상 앞에 엎드려 있더라는 보고라, 목숨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상까지 후하게 탔다고 하는 것이다.
# 함흥차사(咸興差使)
고려 말엽, 왜구를 물리치고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게 된 이성계는 드디어 고려 사직을 둘러엎고 이씨 조선을 세워 그 시조가 되었는데, 외부로 그처럼 화려한 반면에 가정사에 들어서는 매우 순탄하지 못하였다.
젊은 왕비 강(康)씨의 책동으로 막내아들 방석으로 세자를 책봉하고, 개국 공신 정도전이 뒷배를 보게 되자 실지 이조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다섯째 방원은 비상수단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정도전과 배다른 동생 방번과 세자마저도 죽여버리어 자신의 지반을 굳히었다.
태조는 세상에 뜻이 없어 임금자리를 둘째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떨어지는 새 서울 한양을 떠나 송도 옛 서울로 가 있었는데, 이어 방원이 왕위에 오르게 되매 단연 소매를 떨치고 자신의 발신한 곳인 함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새 임금 태종은 체통으로 보나 또하나 정치적인 불안감도 있어, 자주 돌아오십사고 사신을 보냈는데, 그 보내진 사신들은 그때마다 극도로 노여움에 차 있는 태조에 의하여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물론 늙마에 고적감에 젖은 태조는 여러 사람의 권고로 오랫만에 한양 서울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그 사이 계속 보냈던 사신들은 가기만 하였을 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고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흔히 함흥차사라고 하게까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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