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흑백 졸업사진 한 장

如岡園 2010. 9. 1. 11:38

 입학이나 졸업, 소풍, 학예회 같은 기념할 만한 날에 사진 한 장 같이 찍자는 읍내 친구 하나 없는 소년은 서글픈 시절이 있었다.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지만 어쩌다 소풍 같은 때 자기 집에서 라이카 흑백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으스대며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같이 사진을 찍자는 친구 하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그런 읍내 친구들끼리만 사진을 찍는 무리에 끼어들지도 못하면 그야말로 왕따를 당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런 사진들이다 보니 사진은 정신적 재산목록의 1호가 되었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참 많이도 사진을 찍고 많이도 모아 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짐이 되고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이순의 나이를 들어설 무렵이었다. 추억거리로 들여다 본들 감흥이 없어진 지가 오래고 무슨 대단한 명사도 아닌 바에야 역사적 자료가 될 일도 없는 터이었다. 고작 내 가족에게나 어떤 시기에 기록물로서 보관해야 할 사진이 몇 장 필요할 것이로되 그걸 내가 선정하여 보관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 많은 사진을 모두 보관할 수도 없고 함부로 버리기도 아까운 노릇이어서 사진을 CD로 보관하면 된다기에 고가의 컴퓨터 복합기까지 사다가 스캔을 시도했지만 수십 권 분량의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을 재정리하여 스캔하는 작업도 어려웠지만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사진은 아무래도 사진다운 맛이 나지 않아 포기를 하고 말았다.

 나이가 들 만큼 든 지금, 고향사람 모임이나 동창회 같은 데서 묵은 사진들을 가져와 서로 돌려보면, 그 어떤 옛날 이야기보다도 추억거리가 되어 사진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나는 중학교 졸업사진 한 장으로 일류 명사가 된 듯 우쭐해 한 적이 있다. 통영에 있는 청마 유치환 선생 문학 기념관 개관을 준비할 때인데 자료 수집을 맡은 D대학 B교수가 내가 중학교 때 유치환 선생이 안의중학교 교장이 아니었냐면서  그 시절 청마 관련 자료가 있으면 좀 빌려 달라는 청이었다. 마침 청마 선생의 이름 석자가 적힌 내 졸업장과, 검정색 교복의 졸업생 전원의 앞줄 중앙에 하얀 두루마기 차림으로 정좌한 유치환 교장의 모습이 찍힌 졸업사진을 제공했더니 작은 사진을 확대 스캔하여 전시한 모양이었지만 정작 개관식 때는 초청을 받고도 참가를 못해 잊어버리고 있었다.

 더러 청마문학관을 다녀온 주변사람도 있었지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로부터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해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가하는 전세버스에서, 전시된 사진의 존재를 전해 듣고 내심으로 기뻐했던 적이 있다.

 문학을 하는 저변 인구가 드물었던 시절 유명 시인의 제자라는 명분도 자랑스러워 나는 청마 선생에 얽힌 내 나름의 추억을 몇 편 글로 표현한 일은 있다. 그 후로 나는 청마에 관한 일이면 증언을 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모두가 그 흑백 졸업사진 한 장에서 연유된 일이다. 청마를 헐뜯는 네티즌의 댓글에는 분노로 항변을 하기도 했다.

 3년 전 이맘 때쯤에는 거제 둔덕의 청마 유치환생가보존회에서 청마 선생의 생애를 영상물로 제작하여 생가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홍보하려 하는데 영상 제작팀을 보낼 테니 촬영에 협조를 해 줬으면 하는 청탁이 있었다.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직장을 떠난지도 오래고 생활 근거마저 멀리 수도권으로 옮겨버렸는데 행적을 추심하여 청해 준 뜻이 고마워 인터뷰에 응했다.

 서가를 배경으로 하여 밝은 조명으로 촬영 장비를 들이대는 부산한 서둠 새에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인 두 손녀딸들은 할아비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신바람이 나 있어 덩달아 나도 으쓱한 기분으로 청마의 생애 중, 안의중학교 교장 시절과 시세계를 거론하고 그 예의 흑백 졸업사진과 졸업장, 그리고 몇몇 청마 풍경을 떠올릴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하여 촬영에 협조를 했다.

 이것 역시 그 후론 영 소식도 없고 일부러 가 볼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편집 제작 과정에서 자료가 시원치 않아 삭제될 수도 있고 일부의 자료가 선발되어 채택되었을지라도 너무 미미하면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그러구러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손녀딸은 그때 촬영해 간 비디오가 어떻게 됐냐고 은근히 물어왔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를 일이니까.

 괜히 낡은 흑백 졸업사진 한 장을 자랑삼아 떠벌였던 것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이것마저 영 잊고 있었는데 그 반응은 아주 엉뚱한 데서 나타났다.

 

 지난 4월 하순 고향에서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던 날이다. 서울지역 동창들이 한데 모여 버스를 대절하여 고향으로 가는 차 안, 내가 자리한 좌석까지 일부러 찾아와 대화를 청하는 여자 동창생이 있었다.

 같은 초등학교 동창이라 해도 서울 동창생들과는 자주 만날 기회가 적었고, 특히 여자동창생들과는 친분이 없던 관계로 이름도 안면도 잘 모르는 사이여서 아주 민망해하는 나에게 거제 둔덕의 청마 생가를 방문한 이야기를 하는데, 청마의 생애를 추적한 그 예의 영상물에서 인터뷰하는 내 영상을 보았던지 그것을 확인하러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방끈이 짧았던 것이 한이 되어 죽자 사자 딸 하나만은 공부를 시켜 선생을 만들겠다는 것이 필생의 꿈, 그 꿈이 이루어져 딸은 영어교사가 되었고, 영국 미국 등지의 연구기관에서 현지근무를 하는 이학박사 사위를 얻게 되었으며 덕분에 유럽 미국의 몇몇 웬만한 관광지를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꿰고 있는 그가, 지난 늦가을 일시 귀국한 사위와 딸 가족과 함께 남해안 일대를 관광하는 일련의 일정에서 들른 곳이 청마생가였는데 거기 영상물에서 동창생을 보았으니 사위에게 장모로서의 위상이 갑자기 올라가는 기분이더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과정의 이야기에 과장이 좀 덧붙여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한 유명 시인의 기념관 홍보 영상물의 화면에 생각지도 않은 아는 동창생의 얼굴이 떠오는 감동에다, 초등학교만 나온 짧은 학력이 박사 사위에게 늘 미안한 자격지심으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저기에 나오는 저 대학교수가 내 동창생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으니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을 것이다. 

 그때의 그 감격을 내게 털어놓으며, 한편의 소설같은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보니 눈물겨운 연민의 정 이상으로 인간승리의 한 표본을 보는 듯하여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젊음의 한 속성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찍고 사진에 찍힌다는 것은 얼마나 기념할 만한 일이냐.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렀지만 참으로 나는 사진을 많이도 찍고 찍히었다. 대학에서 예술분야 서클인 사진예술연구회 지도교수로 추대되어 서클 지도교수를 10년이나 하다가 지쳐서 그만두고 캠코더로 취미를 옮겨 여행 기록물을 즐기는 사진 애호가다.

 이제 늙어가면서 사진을 찍기도 찍히기도 싫어졌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싫어진 것이다. 젊은 시절 팔순이 넘은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을 때, 사진을 찍어드리려고 하면, "어라! 찍지를 말아! 늙은 사람 추한 모습 보기 싫다." 하시면서 거절하시던 심정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더 늙기 전에 영정사진 한 장 박아두어야 할텐데. 글쎄 그것마저도 미술전공하는 외손녀 솜씨를 빌려 초상화 하나 그려 달래면 안 되나?

 그나마 행여 더 오래오래 기력이 있어 해묵은 고향친구, 동창생 계속 만날 수 있다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빛바랜 흑백사진 서로 가져 와 옛날 이야기 하며 정담 나누는 복이나 누렸으면 다행이겠지.    (2010. 7. 15. 수필 동인지 <길> 11호)    如岡 金在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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