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늙었다는 확실한 징후는 고독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독은 뛰어난 정신을 가진 사람의 운명이며 개개의 인간에게 있어 은퇴와 고독에의 경향의 증가는 항상 그 인간의 지적 가치의 정도에 의하여 생긴다고 하였다.
고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이며 어떠한 심한 공포도 모두 함께 있다면 견딜 수가 있지만 홀로 고독하게 있으면 죽음과도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설령 고독이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고독이 좋은 것이라는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대를 갖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보면 궁극적인 고독은 비극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의 삶의 체계에서 고독이 가능한 것은 아주 젊고 미래에 많은 꿈이 있을 때였거나, 아주 늙어서 과거에 많은 추억을 가질 때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깊은 고독 속에 있는 것, 고독하게 살라!
이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는 어렵다. 고독은 사치한 감정의 유희, 그리하여 고독은 두꺼운 외투와도 같은 것으로, 정작 마음은 그 밑에서 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세상에 나와 혼자서 세상을 떠나니 어차피 혼자되기 연습이라도 미리 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혼자되기 연습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명을 걸고서 서두에서부터 고독 타령을 늘어놓고 있지만 정작 내심은 외로워져야 할 환경에 처하면서 그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방편의 모색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사회 속에서 모든 것을 배워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혼자 고독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독을 사랑하는 자는 야수(野獸)이든가 신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지 않았던가.
고독은 상상력에 대하여 유익한 것이니까 아주 젊고 미래에 대한 꿈이 있을 때에는 고독 속에서 영감(靈感)을 받아들이는 소득을 얻을 수가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고, 세속의 의견을 좇아서 살아가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래집단에서 왕따가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하고,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람과 접촉하여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늙어서 이제, 과거의 많은 추억이나 먹고 살아가는 세월에 있어서 고독의 의미는 사치한 감정의 유희와는 별개의 의미다. 인간의 지적 가치의 정도에 의하여 발생하는 은퇴와 고독에의 경향은 인내로써 견뎌나가지 않으면 안 될 노년의 과제인 것이다.
노년은 노년대로의 창조적인 충동과 힘을 발달시킨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제한된 특별한 경우일 것이고, 노년은 늘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차라리 주름살과 함께 품위가 갖춰지면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니, 거기에서 행복의 여명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노년은 투철하고 원숙하며 고요하여 그 나름대로는 인생의 황금시대다. 섣불리 나서지 말고 조용히 뒤로 물러앉아 있는 일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성격 나름이 되겠지만 자기의 청춘을 노년이 되어 비로소 경험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하면 망발(妄發)이 되기 쉽다.
노인은, 젊은 사람들이 누리는 청춘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폭군이 되어서는 안 되고, 또 어리석게는 불필요하게 젊은이를 비난하고 억제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노인들이 세상을 개탄하며, 세속을 비웃는 태도는 반드시 청년들의 반역성을 조장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노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젊은이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숙(老熟)은 단순한 늙음이 아니라 쌓아올린 교양처럼 고귀하고 원숙하게 느껴지도록 처신하는 자제력이 필요하다.
노년의 세월에 있어서의 인생은 비극의 제5막과도 같다고 한다. 비극적 최후가 가까운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은 혼자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혼자인 것처럼 행동할 일이다. 최악의 고독은 친구를 갖지 않는 일이라고 했지만 노년의 궁극은 혼자가 되는 일이다.
혼자가 되는 길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우선(優先) 과제(果題)다.
거기에는 단계가 있다. 직장의 정년(停年), 각종 모임의 축소(縮小)와 일탈(逸脫), 핵가족(核家族)으로의 전환, 궁극적으로 부부만 남게 되면 그때서부터 뼈저린 고독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완전히 혼자가 되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50년을 한결같이 모여왔던 초등학교 동기동창총회를 해산하는 운명을 맞았다. 구구 팔팔 이삼 사를, 한 이십 년 앞당겨 칠칠 팔팔...로 한다는 것이 그것도 또 일 년을 앞당겨 금년으로 산회(散會)를 하고 말았다. 십년 후에 모이자고 농을 던진 친구도 있었지만 십년 후에 과연 몇이나 살아남아 있을지.
그래서 노년은 고독하다.
노년의 고독을 덜기 위한 최소한의 모임 두세 개도 이가 빠져버리면서, 격월 주기 모임이 계절 주기로 되고 계절주기 모임이 다시 연 3회 모임으로 변해간다.
사회참여 문제는 성격 나름이어서,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왕성하게 끼어드는 경향과 점잖게 물러나 후진에게 기회를 주는 편이 낫다는 생각으로 대별할 수 있지만, 특별히 초대되거나 자문을 구해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양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혼자되기 연습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만 노년이 훨씬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반드시 젊은이보다 더 높은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도 없으며, 어쩌면 현실문제에 있어서는 젊은이와 비등(比等)하지도 않다. 경험은 너무 편협한 것이었고, 생애에 있어서도 말 못할 사정도 있어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사정이야 어떻건 백발의 노인이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 듯한 모습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가 되어야 한다.
늙어서 할 일은 없고 심심하니까 새로운 관계 속으로 뛰어들거나 새로운 것을 얽어 주변을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부질없기는 매한가지다.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동의하는 무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은 없는 법이니까.
시시비비(是是非非) 이해타산(利害打算)과 관련된 인간관계에서 떠나 혼자 침잠(沈潛)하는 것이 노년을 살아가는 기본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소년기에 막연하게 추상(推想)하다가 접어둔 '우주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같은 것을 다시 반추(反芻)하는 것도 상념(想念)을 살찌우는 좋은 사색(思索)거리는 된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농작물을 가꾸고 가축을 사육해 그것들의 생명 현상을 지켜보면서 암묵(暗默)으로 대화하고 그 삶이 얼마만큼 처절하고 신묘(神妙)한 것인가를 느껴볼 일이다.
늙으면 이제 과거의 많은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나이가 된다. 진정으로 그것은 매력적인 노년의 향유(享有)임이 분명하다. 그럴지라도, 같은 추억을 공유(共有)하고 있지도 않은 타인에게는 말하지도 말고 들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할 일이다. 이것 역시 혼자되기 연습의 필수과목이다.
사람이 늙었다는 가장 확실한 징후는 스스로 고독감을 느끼는 일임이 분명하다. 상상력과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젊은 시절의 고독감이 아니라, 인생의 막장에서 느끼는 허망한 고독이다. 그리고 결국 사람은 혼자서 죽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처량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부모 형제 자녀와 같이 피를 나눈 혈족이나, 친구 동창 동료 같은 의리로 만난 인간관계가 아니면서 궁극적으로 해로(偕老)할 최후의 동반자 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법적 배우자일 것이다.
노년의 고독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관심에서 '혼자되기 연습'이라 제명(題名)을 걸고 글을 쓰고 있는데 제목만을 어깨 너머로 넘어다 본 내자(內子)가, 자기가 죽고 나면 혼자 살아갈 궁리나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여 혼자 실소(失笑)를 머금었다. 부부(夫婦)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진리가 절박하게 다가드는 것도 인생의 만년이다. 오죽했으면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는 말이 만들어졌겠나.
혼자되기 연습도 마땅히 부부가 같이하면 되겠지만 그것마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하물며 저 세상 가는 길은 동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니 아무튼 부부가 마지막 가는 길은 먼저 가는 쪽이 행복일 것이다.
(2013. 8. 15. 동인지 <길>14호. 如岡 김재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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