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코 現在의 時에 애착하고 있지 않다. 미래가 너무 천천히 오기 때문에 그 발걸음을 재촉하기나 하려는 듯이 우리는 미래를 바라본다.
또 우리는 과거를, 그 사라져감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그것을 멈추기나 하려는 듯이 되돌아본다. 너무도 조심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 속에서 방황하고 우리에게 속하는 유일한 시간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또 너무도 공허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존하지 않는 시간들을 생각하고, 현존하는 유일한 시간은 무반성하게도 놓혀버린다. 이것은 흔히 현재가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를 우리의 시야에서 감추려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가 우리에게 즐거운 시간이라면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애석하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미래로써 현재를 지탱하려 애쓰고, 거기에 도달할지 어떨지 보증할 수도 없는 시간을 위하여 우리의 힘에 겨운 사물을 준비하려 생각한다.
각자가 자기의 생각을 음미해 볼 지어다. 그러면 자기의 생각이 전부 과거와 미래에 점유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거의 생각지 않는다. 혹 생각할 때가 있다 하드라도 그것을 미래를 처리하기 위해서 현재로부터 어떤 빛을 얻으려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현재는 결코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요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원하고 있다. 또 행복해지려고 언제나 준비하고 있지만 아무리 해도 행복해 질 수가 없다.
결혼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일종의 열병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동방화촉의 열이 식을 때, 그것은 남녀에게 있어서 한 개의 무서운 負債요 짐이요 괴로운 의무가 축적되는 타성으로 변해버릴 뿐이다.
여성보다도, 연애보다도, 가정보다도, 역시 남자에게는 사업이다.
행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 생활에 있어서 똑같이 출렁거리는 파도일 뿐이었다.
승리는 언제나 혁명가의 양심을 시험하며, 현존하는 질서에 반역하는 이상주의자로서의 혁명가는 이제 특권을 누릴 차례가 왔다. 사회는 열광과 폭력의 막간극이 끝나면 정상생활로 되돌아 간다.
신을 믿지 않는 자가 반드시 영원한 진리를 공언하는 救濟의 종교에 敵對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영구한 진리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사회적 운명이 그의 존재의 전부와 최후가 아니다. 부와 권위의 질서는 가치의 질서를 반영하지 않는다. 또 속세적 실패는 가끔 보다 더 높은 성공의 길이요, 인간은 제멋대로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신비스러운 우애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1960년도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