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썩음배기 할마이의 어떤 삶

如岡園 2006. 9. 28. 12:41

 서울 가락동 시장에서 썩음배기 할마이라 불리는 79세 할머니는 작은 손수레에 시장 상인들이 장삿일을 하면서 임시로 필요한 사소한 물건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할머니를 썩음배기 할마이라 이름한 것은 외모가 썩질막한 것도 있지만 그 행위에서 연유된다. 모든 사람들이 하잘 것 없다고 버리는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챙기는가 하면 남이 보잘 것 없다고 관심하지 않는 궂은 일 썩은 일일지라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고 모두 감당해 내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분주한 시장판에서 여름날 막일을 하다가 땀에 절인 런닝을 주체하지 못하고 새로 갈아입을 것이라도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면 으레 거기에는 작은 손수레에 양말이나 타월이나 런닝셔츠 따위를 싣고 썩음배기 할마이가 지나간다. 약방에 감초격이니 이 할머니가 필요도 하겠지만 천의무봉의 이 할머니는 비굴하지 않고, 또 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는 당당한 자존심 때문에 오히려 시장 상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천성이 순박하면서도 나약한 이 할머니를 악착한 삶의 현장으로 몰아넣은 것은 모두 세상 탓이다. 일제 시대의 민족이 겪은 상흔, 해방 직후 남북 분단이 빚은 비극의 잔재가 이 할머니의 일생에 앙금으로 남아 있다.

 1928년 경남 H군 A면에서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이 할머니는 일제 시대 공립보통학교 6년 과정을 졸업한 총명한 소녀로 자라 만 16세, 그 당시로 봐서도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의 조혼 풍습에서가 아니라 그 시절 그만한 경력, 그만한 나이에 결혼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대로 뽑혀 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울며불며 거부하는 그녀를 부모가 떠밀어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이동식 발동기로 방아도 찧어 주고 목재를 벌채 제재하던,시골에서는 꽤나 부유한 집안으로 출가한 것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좌우가 대립되면서 일제 시대와는 또 다른 갈등의 시대가 열려 갔다. 남편은 그 당시 빨치산을 방어하는 민간 자위 단체인 민보단 청년대장이기도 했으면서 기백산 용추계곡 목재를 벌채 제재하여 진주 마산 부산 방면으로 건축재를 공급하고 있었다.

 수목이 울창한 깊은 산속 현장에다가 이동식 제재소를 설치해야 했으니 그런 곳은 자연히 빨치산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 제재소에 빨치산이 들이닥쳐 총칼을 들이대며 남로당원 가입을 강요하는데 총칼 앞에 이길 장사가 어디 있었겠는가. 거기에는 이념도 사상도 있을 수가 없었다. 빨치산을 지키는 민보단 청년대장이 졸지에 본의 아닌 공산당원이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국군 공비 토벌대가 빨치산 아지트를 습격하여 당원 명부 하나를 발견한 것이 문제였다. 거기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었으니 토벌 대상의 빨갱이 신세가 된 것이다. 제재소 인부 8명과 함께 재판도 없이 골무산 언덕배기 임시로 파 놓은 구덩이 앞에서 처형되었다. 양민 학살 희생자의 한 전형으로, 6.25 직전 해 음력 윤칠월 스무나흗날의 일이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가족은 시체마저 수습할 수가 없었다. 집단 가매장한 처형 터 위로는 까마귀가 날아 시체를 훼손하고 그 해사말고 늦은 장맛비가 어찌 그리도 끈질기게 내렸다는지.

 달포가 지나고 야음을 타 숨죽여 시체를 수습하는 현장에 나선 22세 썩음배기 할마이의 뱃속엔 유복 7개월의 태아가 자라고 있었고 부패한 시체가 된 남편의 호주머니 속에는 세 살배기 귀여운 아들에게 줄 과자 봉지가 들어 있었더란다.

 그 해 섣달에 태어난 유복 아들과 그보다 두 살 위인 세 살배기 아들 둘을 거느린 靑孀의 여인이 헤쳐가야 할 인생 길은 고행 그것이었다.

 

 초가 삼간 집 한 채,밭 한 뙈기, 논 너마지기가 남겨진 재산이라면 재산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둘째 아들이 세 살 때 죽는 바람에 또 한 번 가슴에 못이 박혔다. 노동력이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는 없고 장삿길로 접어 들었다. 원한에 사무쳐서도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탕 장사를 시작으로 수예점, 옷가게를 비롯 5일 돌림장까지 봐 가면서 억척같은 인생을 살았다. 쌀 장사 홀아비의 추파도 있었겠지만 그런 면에서는 추상같은 절개를 피내림으로 타고난 집안이다. 돈도 벌 만큼 벌어 종로 네거리 요지에 점포 두 채를 장만할 정도였으니 후회는 없다.

 그러나 인생은 청상의 여인에게 만만치만은 않았다. 모아놓은 재산을 관리하여 불리어 나가는 능력도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 혼자 힘으로는 어려운 것인지 모래성처럼 쉬이 무너져 내렸다. 남편 복 없는 여자가 아들 복도 없게 마련이어서 남편처럼 믿고 의지하면서 유일한 삶의 희망으로 여겼던 나머지 아들 하나마저 장가들기 전에 타계하였으니 청천의 벽력이었다. 삶의 목표를 상실한 허탈감은 모든 것에 파경을 초래하였고, 악착같은 삶이 뒤틀리자 퇴행의 심리작용으로 억지를 부려댔다. 제기동 셋방에서 아들이 죽고나자 주민등록마저도 고의로 말살하고 보호받을 권리마저 포기한 채 움막같은 셋방을 전전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청상의 나이로 남편을 잃고 자식마저 상실한 신앙심이 없는 여자의 고독은 평상의 육친에 대한 우애에 愛憎의 독침을 놓게 마련이었다. 흔히 고독은 자유스럽고 뛰어난 정신을 가진 사람의 운명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하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미화하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그렇게 살아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고독을 사랑하는 자는 야수이든가 아니면 신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지 않았던가. 고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이란 사실은 고독하게 살아 본 그 사람이 가장 잘 알 것이었다. 다만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세속에서 고독에 처한 속세의 인간의 반응에서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결핍과 고독의 고통을 배설하는 애증이 엇갈린 정신적인 역작용이란 무서운 독소이기도 하다.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는 청상의 한이 육친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아집과 역정으로 置換하여 주변 사람들의 심성을 긁어대는 데는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사실 우리들 가족에게 있어 이 썩음배기 할마이는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스물 두 살 청상이었으니 요즘 시속으로 보아 改嫁를 서둘렀으면 오죽 간단했을까. 허나 사람은 편의로만 사는 게 아닐 것이었다. 가문의 체통도 지켜야  하고 그보다 제 속으로 난 어린 자식을 건사할 책임이 더 큰 것이었다. 당사자의 생각으로도 出嫁外人이라 하지만 7남매의 기둥으로서 모범이 되어 주어야 하겠다는 자부심이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아 잇금이 들어가지 않는 일이었다.

 

 아들을 잃고 삶에 맹목이 되어 버린 그녀가 확보한 유일한 교두보는 잡초처럼 강인한 자기 나름의 의지력이었고 그 의지력은 다분히 주관적인 일방통행이었다. 다른 사람이 꺼려하는 썩은 일의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아 하는 바지런함이 세월을 잊게 하는가도 보았다. 古稀를 바라보는 동생에게 수시로 용돈을 쥐어 주는 극성을 부리기도 하는 데는 막을 장사가 없다.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육신에 한한 일이고 정신적으로 본다면야 좀 늙어져야 사람 맛을 내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 그런 게 아니겠는가.  

 인생에 있어서 세월은 모든 것을 가르치고 또 늙음에는 귀천 공명도 없는 것이니 평생에 한으로 맺힌 앙금마저 털어 버릴 때가 오게 마련인가 보다. 썩음배기 할마이가 스스로 포기한 주민 등록을 복원하여 무의탁 독거 노인으로 생활보호 대상자가 된 것도 여러 해가 지났다. 구청 사회복지과 직원이 생활보호 대상자 정황 파악을 위해 다세대 주택 반 지하 그녀의 셋방을 방문하였을 때, 두평 남짓한 작은 방 안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옹그리고 누워 잘 만한 공간만 남긴 채 쓰잘 데 없는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로 가득 찼다. 구청 직원이 친근한 반말로, "할매, 좀 치워놓고 살아라 불 나면 어쩔끼고." 했을때, "아이갸 어림없는 소리, 이것이 내 인생의 그림자인 걸."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른 바 혁신 세력이 이 썩음배기 할마이의 진정한 삶을 통찰할 생각도 여지도 없이 정치적 입지를 위해 편리한 대로 과거사를 팔아먹는 현실을 그녀는 분노하고 통탄하고 그리고 조소한다.

 가슴 아픈 과거사를 세월 속에 묻어두고 고독을 체험으로 달관한 썩음배기 할마이는 돈을 벌기 위한다기보다 삶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오늘도 작은 손수레를 끌고 가락동 시장 바닥을 누비고 있을 것이다.

 

                                                           여강   김  재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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