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岡園 시절
여강원(如岡園)은 우리 가족이 주말 농장 겸해서 20년을 드나들었고, 내가 정년을 한 후 3년 동안은 직접 기거하면서 전원생활을 즐겼던 부산 연제구 거제1동 338-1번지 일대 250평 규모의 거주지 텃밭 이름이자 사이버 공간에서 내 블로그의 별칭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단위를 말하자면 단연 가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통상적으로 집이라고 하지만,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 또는 가족이 생활하는 터전을 일컫는다. 집이 집안이라는 개념으로 외연을 넓히면 삶의 근거, 목숨의 뿌리, 안락함의 보루 등을 의미하면서, 내면적 인간성의 둥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훨씬 내면적이고 인간적인 상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크고 좋은 집과, 좋은 집안 혹은 좋은 가정이라는 개념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나는 한평생 썩 좋은 집에서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좋은 가정에서 자라 좋은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왔다고는 자부할 수 있다.
핵가족 시대로 접어들고, 아파트라는 괴물이 삶의 둥지로 변신하여 투기의 대상도 되는 지금에야 다소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집이라는 건, 지형이라는 자연적 조건과 인위적 수단으로 지어진 건물로, 안식과 식사와 물품보관,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안식성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으면 되는 곳이다.
그야말로 가옥이라는 물체와 인간 문화가 조화를 이룬 둥지며, 보금자리이고, 안빈낙도의 공간인 것이다.
내가 정년을 하던 해, 새로 거주를 옮긴 여강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이름이 거창하여 여강원이지, 그렇다고 전원농장에 비할 바는 아니다. 법원, 검찰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달동네의 다른 집들보다는 조금 모양새를 갖춘, 4칸짜리 기와집에 정원과 텃밭이 다소 넓은 집에 불과하다.
세들어 살던 사람을 내어 보내고, 3개월에 걸쳐 건물 내부를 보수하고, 뜰을 정리하고 텃밭을 가꾸었다. 생시에 선친께서 한 20년간을 드나들며 심어 놓은 호두나무, 감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살구나무, 모과나무, 자두나무, 매실나무, 비파나무, 앵두나무 등 유실수는 거목으로 자라 철따라 만만찮은 과실을 추수하면 되었지만, 향나무, 돈나무, 금목서, 소사나무, 배롱나무, 소나무, 비자목, 자귀나무, 산호수 등 관상수는 끊임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텃밭은 텃밭대로 구획을 정리하여 야채와 과채류를 골고루 농사지어, 먹을거리를 제공받았다.
관상용 화초를 골고루 심어 정원과 출입통로를 장식하고, 장독 옆 바깥 부엌엔 커다란 무쇠 가마솥까지 걸어 메주콩도 삶아내고, 곰거리를 달여내기도 했다. 예전엔 학소대 밑, 온 마을 사람들이 먹었다는 8미터 깊이 우물도 그대로 있어 자동 펌프를 사다가 손수 장치하여, 정원의 화초, 정원수와, 텃밭 채소에 물을 공급하고, 배수로 부근 구석진 공간에는 작은 연못까지 만들어 금붕어를 놀게 했다. 대단한 일이라기보다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주거 공간을 우리 두 부부가 힘을 합하여 직접 다듬어 이룩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었다.
초목이 움트고 꽃피고 잎 피고 자라, 열매 맺고 낙엽 지는 모습을 무시로 가까이서 지켜보며 살아가는 즐거움을 실감하고 누려본 것도 실상은 그 3년간의 여강원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중에서,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던 것 중의 하나가 두 그루 매화나무의 四季였다.
실상 매화나무는 추위가 한창인 중국 북방에서도 유일하게 온실 보온 없이 꽃이 피는 나무이며 새해에 가장 먼저 꽃이 피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꽃이 필 무렵에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된다. 우리 나라도 그 때에 준하여 음력 설날이면 어김없이 꽃이 핀다.
그러나 정작 내가 매화나무에 매혹된 것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은은한 향기와 눈 속의 꽃이라는 점에만 국한된 매혹이 아니라, 꽃을 피워 내는 오랜 과정의 절묘함에 있었다.
매화의 환갑이라 할 6월 하순, 열매가 황금색으로 익어가기 직전, 매실을 따낸 매화나무는 죽음 직전의 산란을 끝낸 연어처럼, 실로 잎마저 칙칙하게 늘어져, 여느 여름나무와는 달리 추한 꼴로 늙어 낙엽으로 옷을 벗는다.
11월에 접어들고 금목서가 여강원 일대에 그 황홀한 향기를 잠간 흩날리다가 금싸라기 같은 작은 꽃알갱이로 떨어져 마당을 덮을 무렵이면, 그 때부터 금세 잎을 떨군 매화나무 가지에서는 벌써 꽃눈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춘절에 꽃을 보는 나무라지만, 기실은 이 때부터 이미 꽃은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깨알만한 꽃눈이 보리알만하게 크다가 또다시 팥알만해지고, 혹독한 추위가 닥치면 주춤했다가 콩알만해지면서, 어느 눈서리 내리는 날 아침, 톡 소리가 나듯 꽃망울을 터뜨리니, 매화나무는 실로 三冬을 거쳐 꽃이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이 필 때까지 여강원에 꽃의 입김을 드리운 고마운 나무였던 것이다.
여강원은 우리 두 부부에게 끝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60여 평생을 대가족으로 살면서 대가족의 리더 격으로 시달려 온 우리 부부가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졸지에 단 둘만의 핵가족이 되었고, 또한 정년으로 할 일 없이 집에 들어앉게 되었던 터에 여강원은 우리들의 주거공간이기도 했지만 육체적 정서적 돌파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을 찾아 일을 한다는 것은 생의 한 큰 의무이자 보람이다. 그러나, 취향을 좇아 일을 할 수도 있고 아니할 수도 있는 인생의 만년이니 의무에서의 일이라기보다 일 그 자체로 낙을 삼았다.
다 먹지도 못하고 다 나누어 주지도 못할 수십종의 과채류를 연중 가꾸어 배가 부르고 눈이 즐거웠으니,
안빈낙도가 달리 있으랴 싶었다.
천성에 타고난 잡손을 부려 손수 축조한 연못에 장난감 물레방아를 걸고, 설 추석으로 떡을 두드려 해 먹곤 하는 확돌엔 수초를 띄워 즐겼다. 참매미가 울어대는 호두나무 그늘엔 평상을 짜맞추어 돗자리를 깔았고 야외용 원탁 테이블 주위엔 하얀색 의자, 그리고 노랑색 초록색의 파라솔...........
정원의 나무 그늘엔 해먹(hammock)을 매달아 이그조틱한 기분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인간의 바지런함이 빚어낸, 작은 낙원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강원 시절 중 심금이 울었던 일은 보리밭과 목화밭 이야기이다. 보리를 관상용으로 심었던 것은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안간힘 했던 시절을 회억하는 데는 좋았지만 그런 걸 호사취미로 즐겼던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찮은 일이었고, 목화를 가꾼 일은 해묵은 정서를 들쑤셔 놓아 가슴이 징하다.
붉고 희고 노란 목화꽃이 가지 끝에서 연이어 피고, 먼저 맺힌 다래는 터져 뭉게구름 같은 솜을 토해내기 시작하던 지난 해 8월 하순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그 서정 깊은 목화밭 옆 지게문 입구에서 두런두런 하는 사람 소리에 이어 한숨 섞인 푸념이 있었다. "내가 너희 둘 공부시키느라고....." 뒷말을 잇지 못한 한숨이었다. 보아하니 농삿일에 찌들대로 찌든, 초라한 옷차림의 시골 아낙이, 자취생활을 함직한 두 남매 앞에서 허룸한 보퉁이에 싸서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온 짐을 풀어헤치고 있었고, 대학 1,2학년이다 싶은 두 남매는 고개를 떨구고 손톱만 물어뜯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금전으로 온라인으로 학자와 용돈과 생활비가 처리되는 현실에서 목화를 생활수단으로 재배하던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한 편의 고전적 드라마가 하필이면 그 여강원 목화밭 곁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주변의 시선을 꺼려,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 싶은 여강원 텃밭 모퉁이에서, 시골에서 가지고 온 반찬이랑 옷가지랑을 전달하며 한숨을 토해 울먹이는 소리였는데, 그것을 내가 목도해버린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 옛날 그 목화밭의 정서가 오늘 이 여강원 목화밭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지? 행여 목화꽃의 정서가 빚어낸 교감이나 아니었던지...... 나는 얼른 자리를 피해 주었다.
如岡園 !! 그 내 삶의 공간은 자연스레 주변의 주목을 받았다. 한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모두는 모두 비슷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절을 따라 변해가는 텃밭의 정경은 길 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실로 하잘것 없는 규모였는데 도심에서, 예스럽고 시골스러운 분위기를 접하니 마음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저게 무슨 나무입니까, 딸기도 있고 보리도 있네요. 이렇게 시골 농사짓던 분위기에서 자라고 도시에 와서 늙은 사람들이 향수를 달래며 머물다가 가기도 하고, 전문가 수준의 카메라 맨이 계절의 테마 작품이라도 구상하는 듯, 하늘을 이고 담 넘으로 가지가 뻗어 자란 감나무며 석류나무 꽃을 촬영해 가기도 했다.
꽃과 식물사진을 주된 테마로 블로그에 올려 수백명씩 블로그 방문객이 쇄도한다는 것을 넌지시 자랑하며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어 접사촬영을 하는 아마추어 스님 사진사의 허풍이 밉지 않았던 것도 모두 꽃의, 식물의, 나이브한 정서에서 연유된 것은 아니었을까!
내 마음을 흔들어 환희의 경지로 몰아넣은 꼬마 방문객이 또 하나 더 있었지. 인근 초등학교 1학년짜리, 이름도 성도 모르는 딸아이 하나는 학교 가는 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 두 번씩 담 너머 작은 연못 속 금붕어를 들여다 보고 한참씩 혼자말로 대화를 하다가, "금붕어야 잘 있어......! 내일 또 보자......!"하고 작별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티 없이 맑은 동심을 먼발치로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여강원이 베푼 시혜였던 게 아닌가.
아무리 크고 좋은 집이라도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인간적 온기가 없으면 이마가 싱그렁하고, 초간모옥에서일지라도 그 속에 사는 가족의 인간적 친애와 우의와 인정이 샘솟으면 안식이 있는 낙원이 되는 법. 집안에 오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면 가운이 쇄락해 가는 증좌라 했다. 사람이 우리지 못할 규모의 큰 집은 흉가나 다름이 없다. 큰 집은 죽음을 불러오고, 작은 집은 복을 부른다고도 한다. 집은 각각 그 사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성격을 가지고 역사의 때를 묻혀가게 된다고 했던가?
사실 내가 사는 집, 아니 집안은 사람 끌어들이기를 좋아하는 걸로 특징지워졌다. 크게 잘살지도 못하는 친인척간이 우리집을 중심으로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 내림이 되어 체질화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여강원 시절로 접어들어서는 전혀 그런 관계에서 사람들이 찾아 와야 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그 타성으로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또 그러한 현상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사람 찾아 오는 걸 좋아하여 구경거리를 만들어 내고 불갈비를 지져대어 유인했는지도 모른다. 친애의 정에 남다르고, 늙어가고 외로워지고, 무엇보다도 할 일이 없었으니까.
사실, 나는 애시당초 여강원에서 종신 때까지의 만년을 기약하지는 않고 있었다. 후진들에 의해 '如岡園'이라 거창한 이름이 붙여진 것도 그곳에 기거를 하면서는 쑥스럽기까지 했던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단, 그만한 입지 그만한 역사, 그만한 인연이 서린 터전이요 보금자리라면, 무슨 색다른 이름 하나쯤 붙여, 정신적 공간,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심어 두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않느냐 싶기도 했다.
自號가 如岡이니, 정년한 여강이 농사짓는 텃밭에서 불갈비 구워 안주하며 소주 파티 할 수 있는 동산쯤으로 자리매김 되었던 현실이기도 했다.
아무튼 만 3년을 그 여강원에서 우리는, 유유자적하며 웃고 떠들고, 우리 주변 세상을 이야기 하며 보냈다. 단명했던 것이 아쉽긴 하지만 어쩌면 짧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三冬을 별러 꽃을 피운 매화가 그윽한 향기를 피워내고 꽃잎을 흩날리기 바쁘게 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2006년 3월 말일 밤, 여강원에서는 마지막 가든파티가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여강원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주 드나들었던 , 스물 가까운 숫자의 불특정 멤버였다. 바야흐로 복숭아꽃이 화사하게 핀 봄밤, 여강원의 꽃그늘에서 나는 李白의 春夜宴桃李園序 詩를 번역으로 낭송하는 것으로 고별사를 대신했다.
"대체로 천지는 만물의 숙소요, 세월은 영원히 쉬지 않고 천지의 사이를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이 중에 인생은 꿈같이 덧없고 짧은 것이니, 이 세상에서 환락을 누린다고 한들, 그 몇 시간이나 계속될 것인가? 고인이 등화를 손에 잡고 밤놀이를 즐겼다는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일이니, 더욱이 때는 봄, 만물이 화창한 계절에 운애 낀 풍경으로 나를 불러주고, 천지는 나에게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재주를 빌려 준 데는 더욱 이 봄밤을 즐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도리화 만발한 동산에 모여서 형제들이 즐거운 놀이를 펼치니, 많은 연소자는 모두 惠連과 같이 시재가 있는 사람들이며, 그 중 나의 詠歌만이 홀로 시 잘하는 康樂에 부끄러울 뿐이다. 고요히 경치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아직 끝나지 않고, 고상한 담화가 갈수록 많은 분위기를 더해가니, 훌륭한 연석에 꽃을 대해 앉아서, 새깃 모양의 잔을 주고받으며 달빛 속에 취한다. 이런 즐거운 분위기에서 시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치있는 마음을 펼 수 있겠는가. 만약에 시가 되지 않는다면 晉의 石崇이 金谷園에서 잔치를 열었을 때, 시 못 지은 사람에게 벌주 삼배를 주던 그 규칙을 따르리라."
그날 그 如岡園의 분위기나 정서가 대체로 이 春夜宴桃李園과 비슷했다 싶었던 것이다. (2006. 길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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