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일시(日時)의 진행, 사계(四季)의 순환은 오묘하다. 밤과 낮은 생(生)과 사(死)와 같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사람의 일생과 같아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법칙이라 치더라도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 사람의 페이소스는 제 나름이다.
사계 중에서 아무래도 봄은 생명의 경이와 신비를 불러일으키는 계절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마음이 들뜨고 바쁘다.
봄기운이 잔설(殘雪)을 녹이면서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양지바른 곳에 새 풀이 돋는다. 진달래꽃 개나리꽃이 피고 복숭아 살구꽃이 피는 봄, 산새가 지저귀는 산기슭과 골짜기에 봄풀이 푸르고 꽃들이 한창이면 봄은 이미 계절의 한복판에 와 있는 것이다.
봄은 사랑의 계절, 봄은 청춘의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갈망하는 것은 노년에 더 있지 않나 싶다.
그리하여 늙은이에게 봄은 취기(醉氣)의 계절, 광기(狂氣)의 계절, 혼돈과 깨어남과 감미한 비애와 도취, 슬픔, 절망, 좌절을 맛보게 하는 계절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정작 나의 마음속에서의 봄은 멀리 남쪽에 있는 벗의 아파트 발코니 분재에 담겨 있는 매화나무의 꽃봉오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늦게 익힌 사진 솜씨였지만 폐부를 꿰뚫어내는 통찰력에 자조적 처절함이 묻어나는 시구(詩句)까지를 곁들인 벗의 노작(勞作)들을 사이버 공간을 통해 전해 받으면서 봄꽃의 정수(精髓), 동양적 관조의 세계로 빠져든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지만 개개의 봄꽃, 그것도 지역의 편차, 기후 조건의 완급에 따라 봄꽃을 완상하는 시기는 길다 하면 길다.
막상 내가 사는 곳의 봄꽃은 꽃망울을 터뜨릴 엄두를 내지 않고 있는데, 매화에서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 배꽃에 이르는 이른 봄꽃들의 황홀한 정경을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촬영한 사진과, 자조(自嘲)를 곁들인 다소 풍자적이기도 한 시구(詩句)를 '강변통신'으로 전달받고 있노라면 눈으로 보는 봄경치의 완상(玩賞)은 대충 끝난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봄의 상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사계 중 이 계절이 던져주는 의미가 심상찮기 때문이다.
봄은 생명력이 약동하는 계절, 봄에는 생명이 태어나고 만물이 소생하고 성장한다. 봄이 오면 그런 현상이 희망을 구현시켜 주기 때문에 봄이 기다려진다.
봄이 오면, 잔설이 녹고 언 땅이 푸석푸석하여 삽질 호미질이 자유스럽기 때문에 흙과 친할 수 있어 좋다.
봄이 오면, 겨우내 웅크려 있던 날짐승 길짐승 벌레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먹이를 찾고 종족 번식을 위한 짝짖기를 서두를 것이다. 그것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뭇 생의 삶의 양태(樣態)를 곱씹어보는 것도 소일거리는 될 것이다.
봄이 오면, 막상 그 시기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추억이 손에 잡히도록 선명히 떠올라 눈물이 나도록 그리워진다.
봄이 오면, 찬바람과 눈보라와 얼음판으로 둘러쳐진 폐장(閉藏)의 겨울에서 벗어나 봄꽃처럼 사람마다 마음의 문이 열려 소통할 것 같아 즐겁다.
봄이 오면, 주변을 좀 잘 다듬고 가꾸고 단장을 하여 새 손님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리하여 봄! 이 계절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마음이 들뜨고 바쁘다.
생명의 약동, 비약, 그리고 향유(享有)! 이 얼마나 가슴두근거리는 화두(話頭)냐.
자연에서 지혜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봄을 철학하는 자세라고 하였다. 생명의 탄생, 왕성한 생명력, 그리고 만물이 소생하여 새 출발을 하는 이 계절을 어찌 고대하여 향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이번 봄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부터 먼저 찾아왔다.
그것은 그야말로 이른 봄의 일대 살륙의 참극이었다. 소일거리로 기르던 닭의 태반을 하룻밤 사이에 맹수에게 약탈을 당한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봄의 향유는 나 하나만의 특권이 아니라 한 겨울을 토굴에서 동면하던 맹금 맹수류의 육식동물에게도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 불찰이라면 불찰이다.
재미삼아 개발 경작하고 관리하는 농장에 2년 전부터 병아리 서른 마리를 사다가 기르고 있었다. 굴밤나무 밑 언덕배기 햇살 바른 양지에 양계용 철망을 두르고 그럴싸한 닭장을 지어 잠자게 하고 과수원으로 얼개가 잡혀가는 농장에 방목을 하는, 취미로서의 양계는 보는 이에게 진풍경이기도 했다.
어미닭으로 자라 알을 낳고, 삼계탕감으로 영양을 공급하는 닭들은 생산적 의미도 있어 보람이었다.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깨는 행위는 그들에게 있어 종족 보존의 당연한 삶의 순차였지만 나에게는 신비함 그 자체였다.
암수의 비율을 조절하여 도축(屠畜)을 해 산란을 조장하고 병아리를 까서 늘어난 숫자만큼 머리수를 줄여 부담을 줄여가던 아마추어로서의 양계가 2년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제법 자신감이 붙기도 하였다.
닭들의 숫자가 줄어 이제 좀 늘려야 되겠다 싶어 지난해 늦가을까지 깬 병아리를 겨울에 동해(凍害)가 없도록 극진히 보살펴가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오면, 농장을 풍요롭게 누빌 닭들의 퍼레이드를 환시(幻視)하면서......
햇살이 포근해지고 지면에 온기가 돌아 이른 봄풀이 고개를 내밀면서 해묵은 닭들은 푸석한 털에 윤기가 돌았고 신참내기 병아리들도 중닭으로 자라 있었다. 겨울에 접어들면서부터 하루 고작 대여석 개씩의 알을 낳던 달걀의 개수가 열 개를 넘어서면서 알을 안길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닭장 안에 갇혀 있던 닭들을 풀어 봄의 기세에 맞장구를 쳐댔다. 논으로 밭으로 과일나무 아래로 떼 지어 종횡무진하는 정경은 흐드러진 봄꽃들의 화사함과는 또 다른 진풍경이었지만, 동면에서 깨어난 침입자의 입장에서 보면 군침 도는 먹잇감의 전시였던 셈이다.
살륙의 봄! 4월은 잔인한 달, 어쩌고저쩌고가 아니라 칠순을 너어선 나에게 있어 3월은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지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을 바라보던 2013년 3월 18일, 심심풀이로 시작했던 양계장은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되고 말았다.
서른 마리에 가까운 숫자에서 절반을 작살냈는데, 네 마리는 물어뜯긴 시체로 남아 있었고 열 마리는 흔적도 없이 물어가고 없었다. 닭장 주위는 뜯겨진 깃털로 난장판이었고, 닭장 안에는 몇 마리 안 되는 잔여 닭들이 혼비백산한 채로 침묵하고 있었다. 그 허탈감, 망연자실(茫然自失)함이야 그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었지만,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승의 일이 만만치가 않음을 깨닫게 해 주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참혹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격으로 닭장을 단속하고 물어뜯겨 비실거리는 상처 입은 닭들을 추스르고, 방황하다 며칠 만에 제 집을 찾아오는 유랑자를 다독였지만 집요한 침입자는 두 차례 세 차례 네 차례에 걸친 집요한 공격으로 아예 씨를 말리고 말았다.
주범은 살쾡이 오소리 너구리 중 어느 한 종(種)의 복수(複數) 침범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모두 야행성이라 확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입춘 우수를 지낸 봄의 들머리에서 졸업과 입학이라는 의식(儀式)으로 일년 주기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직업으로 평생을 살아온 입장에서의 나의 과업은 사람농사였다. 그보다 큰 대업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명제(命題)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자연을 상대하며 그 속에 내재한 진리와 질서를 탐미하는 일은 너무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감미로운 봄, 계절의 왕자! 만물은 피어나고 새들은 노래하고 꽃은 피어난다지만, 그 또한 살라만상이 약육강식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의 한 순환 고리일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또 봄은 기다려진다.
봄이 오면, 집을 정돈하고 화단을 다듬어 꽃씨를 심고 채소를 가꿀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병아리 한 서른 마리쯤을 사가지고 와서 기를 것이다. (동인지 길 14호. 2013. 8. 15. 如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