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자귀나무 斷想

如岡園 2007. 8. 1. 10:05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 주는 녹음수 가운데 녹음도 좋고 잎모양새와 꽃이 모두 아름다운 나무로는 단연 자귀나무가 으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귀나무의 잎은 작은 잎사귀들이 잎줄기를 중심으로 짝수로 마주 나 새의 깃털모양을 이루고, 이렇게 생긴 잎들은 다시 그보다 큰 잎줄기에 짝수로 마주 나 전체 잎떨기 하나가 다시 새의 깃털 모양을 이루고 있는 재우상복엽(再羽狀複葉)이라 무척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있는데, 잔바람에도 잔물결을 이루어 더욱 아름답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7월초부터 8월까지 계속해서 피는 꽃 역시 잎사귀 못지 않은 매력과 특색을 가지고 있다. 명주 실올같이 고운 숱한 꽃술들이 연분홍으로 물들어 꽃송이를 이룬 자귀나무의 꽃은 볼연지 솔을 세워 놓은 듯한 묘한 생김새로 평면을 이룬 잎 위에 둥실 뜨듯 피는데, 잎과 꽃이 함께 아름다워 보는 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내가 자귀나무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으니 꽤나 오랜 인연의 나무라 할 수 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이부자네 과수원집 정원에 유독 눈에 띄게 수관(樹冠)이 아름다운 이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섬섬옥수처럼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그 잎사귀에 꿈결같은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연분홍 꽃술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정원수에 관심하고 정원수를 가꾸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던 나는 그 아름다운 나무가 부잣집 정원에 있다는 것만으로 해서 대단히 구하기 어렵고 고급스런 나무로만 알아왔었다.

 

 그 후 나는 성년이 되고 고향집이 멀어지면서 그 나무의 안부마저 모른 채 도시생활에 젖어버렸는데 우연히 이 나무와 또 다른 인연을 맺을 기회가 있었다.

 지금부터 30년 전쯤 초겨울, 산책 삼아 금정산성을 올랐다가 남문쪽으로 하산하는 길목에서 잎을 모두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자귀나무의 콩깍지같은 열매를 발견했다. 자귀나무의 군락지였던 것이다. 귀족적인 나무라는 생각에서 산야에 흐드러지게 야생하는 줄도 몰랐던 나는 그 자귀나무 씨를 소중하게 따와 그 이듬해 봄에 사과상자에 심어 싹을 틔운 후에 어린 묘목을 작은 화단에 심었다.

 워낙 생장력이 강한 야생의 자귀나무는 급속도로 자라 화단을 모두 덮었다. 여덟살 아래였던 여동생도  자귀나무에 대한 매력을 나와 한가지로 느꼈던지 시골집 뒷뜰에 심어 두고 온 자귀나무를 아쉬워하다가 우리집 화단에 있는 자귀나무를 보고는 도시에서도 이런 나무가 자라고 있구나 하고 한 그루 옮겨 심어 메마른 도시 정원에 장관을 이루었었다.

 

 그런데 자귀나무는 그 속성상 좁은 정원의 관상수이기에는 너무 그 세력이 강성했다. 큰 고기는 큰 물에 놀아야한다는 이치가 자귀나무에도 있었던 것.

 우리집 화단에서 열린 씨를 훑어다가 새로 신축하여 이사한 우리 대학 제2 인문관 건물앞 정원에 작은 묘포장을 손수 만들어 씨를 뿌렸다. 미모사(含羞草)를 닮은 어린 묘목이 기특하게도 잘 자라고 있어 쾌재를 불렀다. 금정산 자귀나무의 손자벌이 되는 자귀나무 3세가 그 당시만 해도 황량했던 우리 대학 캠퍼스에 발을 붙인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묘목을 주로 근무시간 중 나의 행동반경이 되는 인문대학, 학보사, 도서관을 드나드는 길목에다가 틈틈이 남모르게 옮겨 심었다. 실로 100 그루가 넘는 묘목이었을 것이다. 속모를 남들은 화단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파혜치고 잘라내어 상당수의 묘목은 제 구실을 못한 채 사라져버렸지만 20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장년의 나무로 자라 그 귀족다운 풍모를 자랑하고 있다.

 수덕전 대강당을 들어가는 오른쪽 길목에 한 그루, 인문대학에서 중앙도서관을 내려가는 길목에 몇 그루가 대표적인 것이 되겠지만 캠퍼스 구석구석에 자리하여 생명을 부지한 수십 그루 자귀나무는 좀더 세월을 두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귀나무는 우리 나라 황해도 이남 도처에 자생하고 있으며, 잎이 큰 왕자귀나무는 농사의 기상지표목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실크 트리(Silk tree), 실크 플라우어(Silk flower)라고 하는데 잎과 꽃의 섬세함에서 비롯된 이름일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한 나라에서는 합환수(合歡樹),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 유정수(有情樹) 등으로 불린다는데 이것은 자귀나무의 잎이 낮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다가 저녁놀이 질 무렵이면 서로 잎떨기를 맞접는 수면운동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밤만 되면 자귀나무 잎이 맞붙어 잠을 자므로 음양이 합하여 잠의 즐거움을 누리는 나무, 합환수(合歡樹)인 것이다. <박물지>에서는 '자귀나무를 심은 집은 아무도 성을 내지 않는다.'고 했고, <양생론>에서는 '자귀나무는 노여움을 던다.'고도 하였으며, <고금초>에서는 '욕심 많은 생각을 하는 자에게 자귀나무를 선물하면 그 생각을 잊는다.' 고 하였단다.

 

 제자를 키우는 마음 못지 않게 20여 년간 나는 이 캠퍼스에 자귀나무를 심어 키웠다. 근래에 캠퍼스 내에 정원을 가꾸는 과정에서 새로 시집 온 몇 그루의 자귀나무도 있긴 하지만 나는 내가 키운 자귀나무에 더 깊은 의미를 두고 있다.

 자귀나무를 집 주위에 심어 놓으면 가정에 불화가 없어지고 집안이 화락해진다고 하니 애써 심겨진 자귀나무를 닮아갔으면 한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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