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서북부 경남에 있는 금원산과 기백산 등산을 한 적이 있었다. 기백산은 남덕유산의 동편 산줄기의 월봉(月峰)에서 남쪽으로 산줄기가 내달아 이루어진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위천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지우산이라고도 하는 해발 1,340 미터의 비교적 높은 산이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부터 기백산을 들먹이는 까닭은 내 나름대로 이 산에 대한 남다른 감회가 있기 때문이다.
안의에다가 고향을 두고 살아온 나는 나다니엘 호오돈의 단편소설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의 소년처럼 그 산을 우러러보고 자랐다. 그 산은 우리 고을에서 바라보이는 산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면서도 황석산처럼 험상궂지 않고 준수한 모습이었던 데다가 어딘지 후덕하고 자비롭고 인자한 기품이 있는 산으로 감화를 준다고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산이 좋아 우러러보다가 보면 올라보고도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지만, 한국전쟁으로 뒤숭숭했던 1950년대에야 어찌 엄두를 낼 수 있었었던 것인가! 태백산맥,소백산맥 등줄기의 크고 작은 산이란 산의 정점을 중심으로 한 골짜기는 빨치산과 인민군 패잔병의 활동 거점들로 공비토벌의 전투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60년 여름 스물 세살의 젊은 나이에 그 산을 처음으로 등정한 전력이 있다.
등산이 레저문화로 보편화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만 당시의 형편으로는 공비토벌의 전투장을 이제 막 벗어나게 되었다고는 해도 등산이란 말은 생소한 이야깃거리가 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42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에 기백산을 등정하게 되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 등산의 감회는 또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그 등산길에서 내가 주운 녹슨 탄피 한 알에 대한 상념 때문에서이다.
우리 일행이 금원산 자연휴양림 복합산막에서 1박을 하고, 유안청 폭포를 지나 해발 1,353 미터의 금원산 8부 능선 바위틈을 지나다가 나는 녹이 슨 M1 소총 탄피 한 알을 발견했다. 'TW 43'이라고 찍혀진 글자도 선명했지만 녹이 슬 대로 슨 그 탄피 한 알은 1950년대 초에, 덕유, 지리,기백산 자락에서 소년기를 지냈던 나의 판단으로 볼 때, 지금부터 57년 전인 1950년을 전후한 시대의 역사를 입증하는 실증 자료였던 것이다.
짐작컨대 그것은 6.25 때 국군 아니면 미군 보병의 M1 소총을 노획한 공비가 바위틈 저지 거점에서 토벌군을 향해 쏜 탄알의 탄피임이 분명하였다. 등산을 같이 한 일행 중에 현역 장교 한 분이 있어 그 탄피를 보였더니 젊은 장교는 어떤 총의 탄피인지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M1 소총의 탄피라고 하였더니 예비군 훈련 때 사용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지만, 모르긴 해도 평화시기에 해발 1,353 미터 높은 산의 8부 능선 바위틈에서 예비군 훈련 사격이 있을 턱은 없는 것이다.
1950년을 전후한 덕유산 줄기의 월봉산 ,기백산, 금원산 주변은 공비의 소굴이었다. 이태의 빨치산 수기인 <南部軍>에 의하면, 남부군 승리 사단은 그 시절 여름, 전북, 경남의 분수령이 되는 육십령을 거쳐 금원산,기백산 동편 계곡으로 이동했다. 기백산 북쪽 기슭 거창군 위천면 골짜기가 오늘의 금원산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이다. 이 책에서 이태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승리사단은 백운산을 아주 떠났다. 당시 백운산은 전북 유격사령부의 본거지였다. 병약한 몸으로 낯선 타부대에 보내졌던 우리들에게는 야속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수많은 정든 사람들과 수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전북부대를 영원히 이별하는 감회는 매우 착잡했다. 그러나 구대원들은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는 소녀들처럼 들떠 있었다. 목적지는 기백산 북쪽 기슭 거창 땅의 무명 골짜기, 거기서 두 달 전 철쭉꽃이 만발하던 민주지산에서 헤어졌던 인민여단 혁명지대와 다시 합류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때는 이미 한여름에 접어들어, 소백준령을 넘고 넘어 이동하는 긴긴 대열은 땀에 젖어 미역을 감은 듯했다. 모두가 겨우내 걸쳐온 동복차림 그대로였다. 그냥 동복이 아니라 그것만 걸치고 눈속에서 뒹굴고 자고 하던 투박한 겨울차림으로 폭양의 산악을 달리는 것이니 더울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산악지대에서는 밤낮의 일교차가 심해서 이슬을 맞으며 노숙하자면 두꺼운 옷을 아주 벗어버릴 수도 없었다.
몸은 그렇게 고통스러워도 녹음 우거진 산맥을 걷는다는 것은 안전하고 유쾌한 일이었다. 승리사단에 전속된 이래 굶주림 같은 것은 몰랐고 토벌대의 공포도 잊었다.
다시 한번 백전지서와 서하지서를 위협하며 기백산 허리를 동쪽으로 크게 돌아 이틀 만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위천면 어느 무명 골짜기에 도착한 승리사단은 잡목 숲에 은신하고 시간을 기다렸다. 중간 중간에 선요원의 접촉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시간 행동은 시계바늘 같았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저편 숲 사이에 서너 명의 정찰병이 얼씬거리더니 곧 녹음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 갈잎으로 위장한 본대 대열이 콘베이어벨트가 돌아가듯 정확한 4보 간격으로 점선을 그으며 개울가로 내려왔다.
승리사단 구대원들이 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얼싸안고 흔들고 돌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오셨다!' 호위대원에 둘러싸인 한 사나이가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띠며 서 있는 것을 본, 여단과 지대 대원들의 흥분은 자못 절정에 달한 듯했다. '선생님! 선생님!'
마치 승리팀의 학생들처럼 우루루 몰려와 그 사나이를 둘러싸고 만세를 터뜨렸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본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었다. 기록들에 의하면 소백산맥 주변 마을사람들의 견문담이라 해서 이후에도 이 전설적인 사나이의 이름이 자꾸 오르내리지만 이현상은 그 이튿날 남부군 부대와 함께 소백산맥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온 일이 없었다.
이 때 315부대가 승리사단과 동행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남한 빨치산의 최대 최강이라 할 5백여의 대병력이 그 골짜기에 집결한 셈이었다. 골짜기 어귀 산등성이에 보초가 배치되고 교대로 시냇물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더위도 더위려니와 실로 9개월 만의 목욕이니 그 상쾌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윗글 이태의 <남부군>에서 밝혀진 대로 바로 이 곳에서 승리사단에 소속된 인민군 패잔병들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피신하며 토벌대의 공격을 받으면 금원산으로 오르고 했던 것이다. 어쩌면 아니 분명코 지금의 금원산자연휴양림 위쪽 유안청 폭포 밑의 맑은 물일 것이며, 금원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의 요충이 바로 내가 탄피를 발견한 바위틈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두고 볼 때 내가 발견한 M1 소총의 탄피 한 알은 그 때 그 시절 피아간의 전투에서 빨치산이 쏜 총알의 탄피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 녹슨 탄피 한 알에 얽힌 묵은 역사에 대한 감명깊은 회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 작은집 고모부가 된 빨치산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는 최00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 시절 24세이던 최00는 안의면 교북리에 살았다. 공산주의의 이념도 사상도 없는 국민학교 6년 학력을 가진 똑똑한 청년이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수립한 직후에 치안이 확보된 면소재지 변두리 마을에 살고 있었으니 지방 빨치산이 준동하면 죽창을 들고서라도 그들을 막아내어야 하는 것이 그 시절 젊은이의 한 의무이기도 했다.
그런 어느날 밤 안의면 교북리 향교가 있는 마을에 지방 빨치산이 야습을 해 와 양곡을 약탈하고 저항하는 반동세력을 잡아 즉결처분을 했다. 젊은 최00 역시 죽창을 들고 경비를 서다가 동료와 함께 빨치산에 체포되어 安義향교 재천루 앞 마당에서 즉결처분을 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 즉결처분이라는 것이 잔인하기 이를데 없이 돌로 내리쳐 죽이는 것이었다. 사람을 묶어 마당에 누이고 쌀 한 가마니 무게의 들돌을 들어 내리쳐 단번에 죽이더란다. 동료 한 사람을 그런 방법으로 처분해 죽이는 양태를 목격한 다음차례의 즉결처분 대상자의 심정은 염라대왕을 만나 죽음길을 떠나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최00가 처분될 차례가 왔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들돌이 자기 육신을 짓찧어 죽일 것만을 기다리며 묶인 채 누워 있었단다. 그 때 즉결처분 명령을 내리는 대장이 사형 대상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던 것이다. "엇! 너 00 아니가?" 하는 소리에 죽음을 앞둔 00는 사형 집행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좌우익이 대립되었던 해방 직후에 좌익 노선을 지향했던 친구였던 것이란다. 친구는 00에게 "00야! 너 나를 따라 산으로 가서 같이 투쟁을 하자. 좋은 자리도 줄게." 그 당시 그 친구는 남로당 경남도당 간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00는 본의 아닌 빨치산이 되었단다. 빨치산의 간부 독립비밀아지트에 여성 당원을 비서로 거느리게 된 00는 비록 산속의 생활이었지만 지낼 만도 하였고 그런 가운데 6.25 사변이 터져 자기네 세상이 되었다.
소위 해방 통일 조국이 되면 경남 도지사 버금가는 자리에 그들 나름대로 잠정 임명된 상태라, 낙동강 전선 후방의 치안 부대로 고성까지 진출했더랬는데 9. 15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밀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기백산 속으로 숨어드는 지방 빨갱이의 신세가 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금원산 골짜기에 왔을 때, 선생님이 오셨다고 환호하던 집단 속에 최00도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이태의 <남부군>에 기록된 술회는 한치의 에누리도 없는 역사의 실록이다.
정규 인민군 패잔병 신세도 산 속에 숨어들어 있는 처지에 남로당 경남도당을 챙겨 줄 김일성 도당이 아니었다. 초라한 신세의 지방 빨갱이 생활을 산짐승처럼 3년을 하고 나니 진력이 났다. 동료 빨갱이들은 죽거나 아니면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가 되어버렸단다. 공비토벌에서 살아난 것만 해도 다행인 것이다.
그런 정신없는 세상을 살면서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홀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홀로 살아 계시는 교북 역마을 동네를, 빨치산 신세로 몰래 가는 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홀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느날 밤에 하산을 했는데, 경찰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단다.
그 후 남원형무소를 거쳐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다행히 전향 단기수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그런 최00는 어떤 인연이 닿아 우리 작은집 고모부가 되었다.
어떤 기회에 나는 그 최00 고모부로부터 덕유산 빨치산의 역사와 자신이 겪은 체험담을 하루 밤낮을 지새워가며 생생하게 들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한 편의 인생 드라마였다. 그 때 그것을 그대로 기록하였다면 이태의 <남부군> 못지 않는 기록물이 되었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빨치산의 기록은 금기시 되었고 본인 역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대로 흘려버린 것이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몇년 전 10월, 금원산 8부 능선에서 녹슨 탄피 한 알을 발견했을 때, 57년 전 최00 고모부가 부대꼈을 공비 토벌대와 빨치산의 전투에서 빨치산이 쏜 M1 소총의 탄피임이 분명하기에 나는 내가 주운 그 녹슨 탄피를 지금 고이 간직하고서 내고향 기백산 언저리의 얼기설기 얽혀 얼룩진 역사를 가늠해 본다.
(2003. 8. 19 수필 동인지<길>창간호.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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