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으로 樂한다

[스크랩] 등려군 이야기...

如岡園 2008. 3. 26. 10:22

 

 

 

 

 

  

 

등려군에 관하여

 

 

 

 

 

 

등려군이 남긴 소망

등려군 생전 마지막 남자친구인 폴로가 홍콩 한 방송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등려군이 남긴 소망에

대해 얘기 한바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원인으로 학교를 다닌적 없어 글(字)조차 모르는 여성들로 하여금 교육 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 중국 국내에서 "주부학교"를 설립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편 등려군은 "다른 사람들 처럼

청춘을 즐기고 공부에 열중해야 하는 그 시절부터 나는 줄곧 노래만 불러왔다. 만약 다시 한번 생의

권리를 얻는다면 나는 의연히 가수하기를 선택할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것은 그 시간을 조금 늦추고 먼저 학교생활을 누리고 싶다."라고 생전에 자주 말했다고 한다.

 

 

등려군이 좋아하는 곳은

세계 각국을 돌아본 등려군에게 "어디가 제일 좋아요"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홍콩이다.

생전 등려군은 홍콩의 경치가 세상 어느 곳보다 사람을 황홀케 한다고 말한적 있다.

프랑스로 이민을 간 뒤에도 등려군은 매년 홍콩의 별장으로 한동안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한편 생전 등려군은 "지금은 일때문에 안정된 곳이 없지만 나중에 정착하면 홍콩 혹은 대만에서 살고

싶다."라고 밝힌적 있다.

홍콩에서 생전 등려군은 '천향루'의 단골손님이었으며 매번 꼭 '동파고기(東坡肉)'를 주문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파고기'를 주문할 때마다 등려군은 함께 식사하는 친구들에게 이 요리를 애착하게 된 자기

동년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등려군의 여덟개 인기곡

생전 등려군이 살았던 아파트는 현재 "등려군기념관"으로 되었다.

전시홀로 들어가면 황금으로 만들어진 초대형의 음반이 놓여져 있는데 그 위에는 생전 등려군이

불렀던 여덟곡의 노래명이 새겨져 있다.

이 여덟개의 인기곡 순위는 <월량대표아적심>, <첨밀밀>, <안녕, 내사랑>, <소성고사>,

<너밖에 없어>, <여유있는 인생길>, <해운>, <그 사람을 잊어>이다.

 

 

 

 

 

 등려군의 사후 수정관에 넣어져 참배객들에게 보여졌던 모습

 

 

 

대만 타이빼이 금보산(金寶山) 등려군의 묘(아래)

 

약 200평의 넓이에 조경이 아름다운 그녀의 묘지는 입구에 피아노 건반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녀의 흉상이 오른쪽에 놓여 있고,왼쪽에는 금박으로 약력이 돌에 조각되어 있다. 검정색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는 묘비석에 등려군의 사진과 그녀의 본명이 적혀 있다. 
묘지에는 365일 등려군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밤이나 낮이나 흘러 나오고,참배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추모의 향 또한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1995년 5월 8일
홍콩과 대만,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여러 나라의 신문과 뉴스에서는 대대적으로 속보를 전했다. 중국인들 마음속에 영원한 연인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았던 가수 등려군(鄧麗君)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프랑스인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던 태국의 한 호텔에서 사망한 그녀는 당시 42세의 나이였고, 사인은 호흡 곤란이었다고 전해지며, 우리 나라에서도 외신을 통해 보도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전 중국어권 사람들의 애도 속에 금보산 한구석에 영원히 안치되었다. 그녀는 수정관에 넣어져 참배객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녀의 노래와, 아름답게 단장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참배객들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호화스런 장례나 호화분묘에 대한 중국인들의 집착은유교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에서 기인되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등려군이 비록 세인들의 뇌리 속에 영원히 자리잡는 것도 좋지만,그녀를 영원한 안식처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하자 등려군 문화재단에서는 그녀의 수정관 위에 대리석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금보산 사업집단(金寶山 事業集團)의 총재가 등려군의 열렬한 팬이다.
등려군이 죽자,총재는 그녀에게 무상으로 묘지를 기증하고 싶었지만,대만의 국내법상 묘지를 기증할 수 없어서 등려군 문화재단에 묘지를 1 NT$에, 묘비석도 1 NT$에 판매했다. 
그 후 등려군 묘지 주변의 땅을 구입하려는 외국인과 중국어권의 사람들의 문의가 빗발쳤으나,
등려군의 묘지 주변은 이미 모두 매각이 된 후였다. 
그들이 등려군 묘지 주위의 땅을 사려는 이유는 죽어서라도 등려군의 옆에 누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처녀의 신분이었다. 
등려군은 살아 생전에 군인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바쁜 일정 중에도 군인들을 위한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그러한 이유로

젊은 남녀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출처 : 이하람
글쓴이 : 이하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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