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선조들의 여름철 얼음 활용

如岡園 2019. 7. 25. 16:20

 지금은 얼음을 제빙(製氷)해서 쓰지만 옛날에는 말할 것도 없이 천연빙(天然氷)을 저장했다가 썼다.

 우리나라에서 얼음을 쓴 이야기는 신라시대부터 나오니, 얼음을 여름에 사용한 역사는 길다.

 조선시대 나라에서는 얼음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여름철에 임금이나 궁중에서 사용하기 위해 얼음을 저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폭넓고 다양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는 세 곳에 빙고(氷庫)를 두었다. 한강 동북쪽 뒴개(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근방)의 동빙고(東氷庫), 한강의 둔지산(지금의 용산구 서빙고동)의 서빙고(西氷庫), 그리고 궁중에 둔 내빙고(內氷庫)이다.

 이 세 곳의 얼음은 제사를 맡아보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했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얼음이 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 올리는 얼음을 저장키 위한 것이 빙고를 설치한 주목적이었다. 동빙고에서는 제사얼음을 저장했고, 서빙고에서는 궁중과 백관들에게 얼음을 공급했다. 그리고 내빙고에서는 얼음을 임금에게만 바쳤다.

 이들 빙고는 조선조 초기에 설치되었다. 매년 섣달에 담당 관리가 나가서 '추워달라'는 사헌제(司寒祭)를 지냈다. 그 제단은 동빙고가 있는 근방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현명씨가 모셔져 있었다. 

 현명씨는 비나 북방의 신 또는 한신(寒神)으로 받들어지는 신이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한강의 얼음을 떠다가 빙고에 보관하는 것이다. 서빙고에는 다섯칸의 얼음 곳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겨울이 따뜻하여 한강의 얼음이 엷으면 산골의 얼음을 깨어다가 보관하기도 하고, 또 산골의 얼음을 실어올 수가 없으면 주로 경기도 지방의 산골에 얼음 창고를 만들고 얼음을 저장케 했다.

 봄이 다가와 춘분이 되면 역시 빙고의 제단에서 현명씨에게 향사(享祀)를 올리고 개빙제(開氷祭)를 지냈다. 곧 얼음을 열어 사용하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얼음을 귀중하게 다루었고, 그 보관에도 무척 손질과 신경을 썼던 것이다. 또 얼음을 저장하는 방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얼음 장마다 톱밥을 깔고 짚을 덮고 밀폐하는 방법을 쓴 것 같다.

 

 한편, 이 세 곳 외에도 각 지방에 빙고를 두고 있었다. 경기도 근방에 빙고를 둔 것 외에 주요 도시에 빙고를 두고  제사 또는 관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이들 빙고에는 얼음을 저장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대기 위해 빙부전(氷夫田)을 두어 일정한 토지에 조세도 물지 않게 하였다.

 선조 때에는 유덕수라는 신하가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하였다.

 "나라에서 얼음을 저장할 적에 1년의 용도를 헤아려서 그 넉넉한  수를 채웠다. 만약 담당 관리가 마음을 써서 잘 지킨다면 부족할 리가 만무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서빙고의 관원이 관리를 태만히 해서 얼음을 실어 내올 적에 일꾼들이 훔쳐가는 일이 생겼다. 여름이 지나지 않았고, 용도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벼슬아치와 종실(宗室)에게 늘 얼음을 하사하는 일을 중지한다면 여론이 좋지 않을 듯하다. ......또 지방에서 빙정(氷丁)이 상납할 적에 담당 관리들이 훔쳐내는 일 따위의 직폐가 있을 것이니 잘 살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선조실록 13년 7월조)

 이로 보면 얼음을 훔쳐내는 일도 많았던 것 같다.


 임금이 일정한 분량의 얼음을 신하들과 왕실의 일가들에게 내려주는 관례도 있었다. 이런 관례는 오래 전해 오는 것이어서 만약 얼음이 모자란다고 이를 중지하면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궁중 각전(閣殿)의 전감(殿監)들은 얼음을 각색으로 물을 들여 왕비나 비빈들에게  바친다. 이 색깔얼음을 궁녀들에게 나누어주는 날은 법석을 떨었다.

 또 신하들에게 얼음이 하사되면 온 가족들은 신기해서 모여들고 한덩이씩 골고루 나누어 맛보았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시골 선비가 대과에 급제하여 궁중에 출입케 되었는데 임금으로부터 얼음을 하사받았다. 그는 이를 소중하게 싸들고 집에 와서 대청에 내려놓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 한식경이 지나 식구들을 모아놓고, 얼음 구경을 하라고 큰소리 치면서 얼음상자를 열어보자 물만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얼음을 궁중에서만 쓴 것 같지는 않다. 귀한 손님을 접대하거나 시골의 부잣집에서도 얼음을 저장해 사용한 경우도 흔했다.

 다산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있을 적에 인부들을 시켜 얼음을 저장케 했다. 땅을 파서 저장할 곳을 마련하고 얼음을 떠다가 톱밥과 짚으로 덮어두었다. 구실아치들은 어리둥절했다. 다음 해 여름에 이 얼음을 꺼내 사신 일행을 접대하는 데에 팔기도 하고 이웃 고을에 팔기도 하여 많은 이익을 남겼다 한다. 그리고 이 이익금을 관아의 경비로 썼다 한다. 이때서야 백성들은 얼음 저장의 뜻을 알았다는 것이다. 


  또 얼음을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얼음놀이도 있었다고 한다. 얼음신을 신고 얼음덩어리를 옷 속에 넣는 따위의 놀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얼음 활용은 서민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었고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이화, <우리 겨레의 전통생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