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수필' '久遠의 女像'/皮千得

如岡園 2008. 7. 24. 13:02

                 # 수필

 

 수필은 청자 연적(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플로니우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버리는 것이다.

 

          #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구원의 여상(女像)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 루부르 박물관에 있는 헤나의 파비올라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좁은 길이라고 믿는 알리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불타 오르던 과거를, 쌓이고 쌓인 재가 덮어버린 지금은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언제라도 볼일이나 유람차 님므 부근에 오시거든 에에그비브에도 들려주세요." 이런 편지를 쓴 줄리엣도 구원의 여상(女像)입니다.

   지나간 날의 즐거운 회상과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이 고이 모인 얼굴

   그날그날 인생살이에

   너무 찬란하거나 너무 선(善)스럽지 않은 것.

   순간적인 슬픔, 단순한 계교

   칭찬, 책망, 사랑, 키스, 눈물과 미소에 알맞은 것.

 워즈워스의 이런 여인도 구원의 여상입니다.

 

 여기 나의 한 여상(女像)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같이 맑습니다. 때로는 흐리기도 하고 안개가 어리기도 합니다. 그는 싱싱하면서도 애련합니다.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애수를 깃들이고 있습니다. 원숙하면서도 앳된 데를 지니고, 지성과 함께 한편 어수룩한 데가 있습니다. 걸음걸이는 가벼우나 빨리 걷는 편은 아닙니다. 성급하면서도 기다릴 줄을 알고,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수줍어할 때가 있고, 양보를 아니하다가도 밑질 줄을 압니다.

 그는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움은 사람을 매혹하게 하지 아니하는 푸른 나무와도 같습니다.

 옷은 늘 단정히 입고 외투를 어깨에 걸치는 버릇이 있습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나 가난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파이어플레이스에 통장작을 못 필 경우에는 질화로에 숯불을 피워놉니다. 차를 끓일 줄 알며, 향취를 감별할 줄 알며, 찻잔을 윤이 나게 닦을 줄 알며, 이 빠진 접시를 버릴 줄 압니다.

 그는 한 사람하고 인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지위, 재산, 명성 같은 조건에 현혹되어 사람의 가치평가를 잘못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예의적인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합니다.

 아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남이 감당하지 못할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사치하는 일은 있어도 낭비는 절대로 아니합니다. 돈의 가치를 명심하면서도 인색하지 아니합니다. 돈에 인색하지 않고 시간에 인색합니다. 그는 회합이나 남의 초대에 가는 일이 드뭅니다. 그에게는 한가한 시간이 많습니다. 미술을 업으로 하는 그는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오래오래 산책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색채가 밝고 맑고 화폭에 넓은 여백의 미가 있습니다.

 그는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나 인생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아니합니다.

 그는 마음의 허공을 그대로 둘지언정 아무것으로나 채우지는 아니합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사랑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서는 아니될 남의 호의를 정중하고 부드럽게 거절할 줄 압니다.

 그는 과거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생애의 일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는 예전 애인을 웃는 낯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몇몇 사람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섬기지는 아니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을 아량 있게 이해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정직합니다. 정직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그는 자기의 힘이 닿지 않는 광막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고갈하지 않는 윤기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유머가 있고, 재치 있게 말을 받아넘기기도 하고 남의 약점을 찌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때는 매우 드뭅니다. 그는 한 시간 내내 말 한마디 아니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라도 그는 같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기쁨을 갖게 합니다.

성실한 가슴, 거기에다가 한 남성이 머리를 뉘고 살 힘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서 평화롭게 죽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가슴을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 영혼의 존엄성, 진리와 미, 사랑과 기도, 이런 것들을 믿으려고 안타깝게 애쓰는 여성입니다.

                                               

                                                                                                                                                皮千得 <琴兒文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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