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정년 퇴직자/찰스 램

如岡園 2008. 10. 7. 09:44

 독자여, 지긋지긋한 사무실에서 인생의 황금기 - 빛나는 그대의 청춘을 허송해야 하고, 그 속박의 나날이 중년을 거쳐 은발의 노령에 이르기까지 석방이나 유예의 희망조차 가질 수 없고 휴일이란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거나 아니면 어린 시절의 특권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 그대의 운명이라면, 그때는 어쩌면, 아니 그때에만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처음 하루 이틀 동안은 들떠서 나는 멍한 기분이었다. 행복을 잡았을 뿐 너무 어리둥절하여 진정으로 맛볼 수 없었다. 나는 30년의 감금생활에서 갑자기 풀려난 바스티유 감옥의 수인(囚人)의 상태에 놓인 것이다. 나 자신이 내가 어떻게 된 것인지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시간이란 개념을 벗어나 '영원'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이 '시간'을 온통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나는 주체할 수 있는 시간 이상을 수중에 넣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시간에 궁한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 거창한 수입이 있는 처지로 갑자기 끌어올려진 것이요, 내 소유의 한계를 알 수도 없어 내 대신 시간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청지기나 영민한 관리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기 경고해 두고 싶거니와 활동적인 사업에 오래 종사한 분은 시간 관리의 재능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평상시 하던 일을 한번에 당장 그만두지 마시라. 그건 위험하다. 나 혼자 생각이지만, 내 관리 능력은 무던한 것이어서 이제 그 처음 아찔했던 황홀감은 점차 가시고, 축복받은 내 처지를 조용하고 차분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둘러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시간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산책으로 몰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옛날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던 일요일에 그날을 최대로 이용하려고 하루에 30마일을 걷곤 했듯이 온종일 걸을 필요가 없다. 시간이 귀찮다면 독서로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을 켜야 하는 저녁 시간밖에 내 시간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겨울철이면 머리를 짜고 눈을 상하곤 했듯이 그렇게 격렬하게 읽을 필요도 없다. 나는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아니면 발작이 날 때는 낙서를 (지금처럼) 해대기도 한다. 그러나 이젠 기쁨을 쫓지 않고 기쁨으로 하여금 내게 오도록 한다. 어느 시에서 말했듯이 나는,

    어느 푸른 황야에서 태어나

   세월이 그에게 오게 하는

사람과 같다.

 '세월, 이 퇴직한 얼간이가 무슨 세월을 헤아리고 있단 말인가? 쉰 살이 넘었다고 이미 말하고선' 하고 독자들은 말할 것이다.

 사실 나는 정말 액면상으로는 50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 세월에서 나 자신에게가 아니고 타인에게 살아준 시간을 빼보라. 그러면 내 나이 아직 젊은 청년임을 인정할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것이 정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오직 진정한 시간이요, 전적으로 자신에 대해 갖는 시간이지 나머지는 어느 의미로는 그 시간을 살았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이지 자신의 것은 아니다. 내 가련한 여생의 남은 시간은 길든 짧든 내게는 적어도 세 배의 시간이다. 내 인생의 다음 10년은, 그때까지 산다면, 앞에 보낸 생의 30년과 같다. 이는 삼단 구구의 정확한 수치다.

 자유가 시작되던 순간에 내가 사로잡혔던 그 야릇한 환상들 가운데서, 그 중에서도 그 흔적을 지금도 완전히 씻어버릴 수 없는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 계리사무소를 그만둔 사이에 엄청난 시간의 간극이 끼여들었다는 환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요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게도 여러 해 동안 연중 날마다 그렇게도 여러 시간을 그렇게도 가깝게 지내온 그 중역들이며 사무원들 - 금방 작별한 그들이 내게 죽은 것만 같이 느껴진다. 어느 친구의 죽음에 부친 로버트 하워드 경의 '비극'이란 시 속에 이와 같은 환상을 표현해 줄 훌륭한 구절이 하나 있다.

   그대 떠난 지 촌각이라

   내 눈물 흘릴 틈마저 없었는데

   누천년 헤어진 양

   그렇게도 그 사이가 먼 것만 같구나

   억겁의 영원인데 길고 짧음 있겠는가

 이 어색한 감정을 무산하기 위해 그 후로 한두 번은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고, 나의 옛 사무실 동료들 - 교전상태에서 내가 저버리고 떠났던 그 필경(筆耕)의 전우들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친절을 베풀어 나를 반겨주는데도 그때까지 함께 누렸던 그 흔쾌한 친밀감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예전과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그것마저 내게는 멀고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내 책상, 모자를 걸던 옷걸이는 다른 사람에게 배당되어 있다. 그러리라는 것은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농담과 재담으로 나의 직업 험로를 부드럽게 해주던 30년 하고도 6년의 내 옛 동료들, 그 고된 일을 함께 나눴던 그 충실한 협동자들을 작별하는 마당에 다소의 회한을 느끼지 못한다면 악마가 나를 데려갈 것이요,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짐승이리라. 그런데 정말 그때가 그렇게도 험란했던가? 아니면 단순히 내가 겁쟁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후회하기엔 너무도 늦었다. 이런 경우 그런 후회를 한다는 것은 흔히 있는 잘못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복받쳐 오르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들 사이에 묶여 있는 끈을 우지끈 끊어버린 것이다. 그건 적어도 예의가 아니다. 이 이별이 진정되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잘 있거라! 깡마르고 빈정대기 좋아하면서도 친절했던 C군! 너그럽고 둔한 동작에 신사답던 D군! 지나치게 서두르고, 자청해 일하기 좋아했던 훌륭한 일꾼 P! 그리고 너, 육중한 집, 그레샴이나 휘팅턴 같은 시대의 당당한 상역관(商易館)에나 어울릴 건물인 너, 미로의 통로들, 연중 절반은 촛불로 햇빛을 대신했던 답답하고 음침한 사무실들 - 내 건강의 가해자요, 내 삶의 준엄한 양육자였던 너 또한 잘 있거라! 나의 노작(勞作)들! 떠돌이 책장수의 어두운 책더미 속이 아니라 그대의 품에 남아 있으라!  아퀴나스가 남겨 놓은 것보다 더 많은 내 육필(肉筆)의 회계장부들, 너의 빽빽한 선반에 가득히 쌓여 노역에서 풀려난 나처럼 쉬게 하라! 나의 의발(衣鉢)을 그대들에게 남겨놓는다.

 첫 회사 나들이가 있은 후 2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마음이 잔잔해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고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실 평온하게 된 것을 자랑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불안감, 쇠약한 눈에 비친 낯선 광선의 현기증 같은 무언가 제1차적인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전에 나를 얽어매고 있던 사슬들이 마치 내 옷에 없어서는 안될 어떤 부분처럼 정말 그리웠다. 나는 엄격한 독방 수도 생활에서 어떤 혁명으로 인해 갑자기 세상으로 귀환한 불쌍한 카르투지오의 수사(修士)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나는 이제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닌 적이 없었던 것과 같은 기분이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이 늘 있어 왔던 일처럼 여겨진다. 대낮 11시에 홀연 본드 스트리트에 나왔지만 예전부터 그 시각에 그곳을 산책해왔던 것만 같다. 소호로 들어가서 서점을 뒤진다. 마치 서적 수집가로 30년이 된 기분이어서 거기에도 신기하고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홀연히 아침 풍경을 대하고 있는 기분이다. 전이라고 다른 적이 있었던가? 피쉬 스트리트힐은 어찌되었는가? 펜처치 가는 어디에 있는가? 30년하고도 6년 동안 매일 순례의 발걸음으로 닳아진 민싱로의 돌, 일에 지친 사무원의 발걸음이 부딪칠 때마다 그 딱딱하던 부싯돌 소리가 이제 노랫소리로 변했는가? 나는 팰맬(클럽이 많기로 유명한 런던의 거리)의 보다 즐거운 깃발로 마음이 쏠렸다. 때는 장날인데 나는 이상하게도 즐비하게 늘어선 석상들 가운데에 서 있다. 내 처지의 변화를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해도 과장이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내겐 시간이 멎어 있다. 나는 계절의 차이를 모두 잃었다. 요일도 모르고 날짜도 모른다. 전에는 하루하루가 아직 겪지 않은 생소한 날들에 관련되고 다음 일요일도 멀고 가까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느껴졌었다. 수요일의 느낌이 달랐고 토요일 저녁의 흥분이 있었다. 온 주일의 요일 하나하나의 특징이 내게는 분명했고 나의 구미와 기분 등에 영향을 주었다. 주말까지의 따분한 닷새를 보낼 월요일 날의 무슨 마력이 그 검정색을 하얗게 표백했단 말인가? 그 잿빛 월요일은 무엇이 되었는가? 모든 날들이 한결같다. 일요일 - 덧없다는 아쉬움, 최대의 기쁨을 얻어내려는 지나친 걱정 따위로 번번이 실패한 억울한 휴일이었던 그 일요일 자체가 녹아내려 평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교회에 나갈 여유도 생겼다. 휴일을 동강내는 것으로 여겨지던 그 시간이 아깝지가 않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몸져 누워 있는 친구를 찾아갈 수도 있고, 일에 골몰해 있는 친구를 찾아가 그것도 가장 바쁜 시간에 훼방을 놓을 수도 있고, 이 5월의 화창한 아침에 윈저에가서 함께 하루를 즐기자고 초청하여 일하는 사람을 무안하게 할 수도 있다. 나와는 완전히 상관없게 된 그 불쌍한 노역자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로마의 전설에 나온 열녀 루크레티아를 대하고 있는 기분이다. 돌려도 돌려도 끝 없는 연자매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방앗간의 마소와 같다 -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선가? 사람이란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많이 주면 줄수록, 할 일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만일 내게 어린 자식이 있다면 그에게 불유노작(不有勞作)이란 세례명을 붙였을 것이다. 아무일도 하지 않도록 말이다. 진정 믿거니와 사람은 활동하는 한은 사람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나야말로 전적으로 명상적인 삶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지진이라도 고맙게 일어나서 그 저주스런 면화공장들을 몽땅 삼켜버리지 않을 것인가? 거기 저놈의 책상을 가져다 멀리 던져버려라!

   천장지하(天丈地下) 멀리 멀리  악마에게로

 나는 이젠 상사 따위의 서기가 아니다. 나는 은퇴한 한유거사(閑遊居士)가 아닌가? 곱게 단장한 정원에서나 만나게 되어 있다. 나는 이미 텅빈 얼굴, 태평스런 거동, 일정한 걸음걸이로 정해진 목적도 없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걷는 것이지만 실상 가는 데도 없고 오는 데도 없다. 사람들은 내 인품에서 보지 못했던 무언가 고상한 기품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칭찬을 한다. 그동안 다른 좋은 성품에 묻혀 있던 것이 이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알아보게 고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신문이란 것을 집어 들었다면 그것은 오페라 사정이나 알아보기 위함이다. 일은 끝나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마쳤다. 내게 할당된 노역을 마쳤으니 남은 날은 내 자신의 것이다.  

 

                                        찰스 램(Lamb,Charles. 1775-1834)

                                                  영국의 수필가, 시인

                                                  해학과 고아한 문체로 영국 수필의 제1인자

                                                  베이컨 이후의 영국 수필문학 완성자 

                                                  동인도회사에서 정년 퇴직하고(1825) 

                                                  시집 등을 썼음

                                                  수필집 <엘리아의 수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