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剛毅正大한 천성에 寬弘磊落한 도량을 겸하여 스스로 정의라고 믿는 바에 대하여는 萬乘의 존엄과 三軍의 威武로도 능히 굴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부귀로써 說하고 빈천으로써 試하며, 심지어 골육간 至情으로 차마 못할 苦肉策을 弄하여서도 필경 어찌 못하는 堅確한 操守가 있었다.
그러나 일면으로 그 관홍뇌락한 襟度는 繩墨尺寸에 구애치 아니하며, 怒를 藏치 아니하고, 怨을 含치 아니하고, 그 事를 정하되 그 人을 죄치 아니하며, 겸하여 풍자 해학에 깊었으니, 이는 그 수련이 원숙한 만년에 이르러 일층 그 圓轉滑脫의 妙를 발휘한 慨가 있었다.
이 성격, 이 襟度와 이 操守, 이 수련으로써 기구한 世路를 跋涉할 새, 선생의 처신발언은 悲壯이 아니면 侃악이며, 간악이 아니면 원활한 풍자가 되어 자초지종이 비범이며 奇警이니, 이를 거두어 순서로써 편찬하면 선생의 전기가 될 것이요, 一事一言으로써 여列하면 일화가 될 것이다.
이제 선생의 전기가 편술되어 그 대략을 수습하였은즉, 이에 중복함을 피하고자 하거니와, 다만 그 遺漏된 숫자로써 선생의 遺風餘烈을 추모키 족한 자를 이에 기록코자 하는 바이다.
잘하면 또 시키게
선생이 竹泉 朴定陽씨 댁에 유숙하실 때의 일이다.
죽천은 명문거족으로 早歲에 出仕하여 원대한 뜻을 품고 일세의 偉人傑士를 納交할 새, 약관의 선생을 科場에서 한 번 相識하자 그 영민한 才局과 博洽한 식견에 경도하여 마침내 막역의 友로써 相許하고, 필경 동거하기에 이르렀다.
죽천이 病臥하여 교분의 無間함을 믿고, 선생에게 迎醫의 勞를 청하였다. 선생은 곧 醫家에 이르러 초면의 의원을 보고 일렀다.
"자네가 아무개인가? 박판서가 대단히 앓으니 좀 가보게."
이와 같이 一言을 告하고 돌아왔다.
후일 죽천 家人이 이 일을 알고 선생의 무례를 책하니, 선생은 自若한 태도로 대답하여 말하되,
"심부름은 잘하면 또 시키는 법이야."
대개 이는 죽천이 士人을 遇하기 예로써 아니하였음을 諷規함이다.
투석한 아동의 석방을 요구
선생이 북미에 使하여 워싱턴에 체류할 새, 하루는 공사 일행으로 더불어 새모관대의 위의를 갖추고 시가를 유람하더니, 시중 兒輩가 일행의 진기한 행색을 보고 投石 조롱한지라, 警衛의 경관이 이를 檢束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몰각한 아배를 연민히 생각하여, 친히 석방을 요구하니, 이로 인하여 조선 공사의 仁厚한 덕망이 美京에 喧傳되었더라.
諷諫의 일례
선생이 미국으로부터 復命할 새, 고종께서 미국의 好意 유무를 下詢하시니, 선생이 伏奏하되,
"폐하께서 선정을 베푸시면 미국의 호의를 가질 모양이오며, 不然하오면 가졌던 호의도 없어질 듯 하외다."
대개 忠君愛國의 至情에서 나오는 諷諫의 일례이다.
恩命도 사퇴
선생이 공사 박정양으로 더불어 미국에서 돌아오자, 고종께서 그 공로로 군수를 除하고자 하시니,
때는 對美 단독 외교문제로 청국의 간섭이 자심하여 책임자인 박씨는 門外黜送을 명하였고, 賜藥問題가 있을 때이다.
"같이 사신으로 갔다가 上使는 罪中에 있고, 下僚는 榮職을 膺함이 도리가 아니올시다."
上奏하니 고종께서 다시,
"아들이 몇이냐? 큰아들은 과거를 보이라."
하명하셨다.
그러나 선생은 역시 사퇴하여,
"신의 자식이 촌에서 농사만 짓던 것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하니,
擧世가 獵官求仕에 열중하여 唯日不足하던 당시의 일이라, 在傍하였던 沈 재상 相薰이 그 淸直함을 敬仰하여 후일 남에게 말한 바이러라.
三人만 誅하면 족하다
을유년에 相臣 김홍집이 선생으로 더불어 정사를 의논할 새,
"방금 전국에 탐관오리가 있어서 백성을 도탄중에 빠지게 하니 8인만 죽여야 하겠어"
하니,
그 뜻은 대개 8도 감사를 誅하겠다 함이다.
선생은,
"8인까지 갈 것 있소, 3인만 죽이면 될 것이요"
대답하니,
그 뜻은 三相만 誅하여도 족하다는 뜻이다.
金相이 이 말을 듣고 당目良久에 말이 없었더라.
時宰에 一矢
하루는 공사에 관련하여 민응식을 방문하고, 竹泉의 信書를 전한 일이 있었다.
민씨는 修人事 후 一言反辭가 없이 서찰만 쓰고 있었다.
그 태도가 驕傲함을 미워하여 짐짓,
"侍生은 가겠소." 하니,
민씨가 만류하여 가지 말라 한다.
"시생이 公事를 상의코자 왔더니 대감이 그처럼 悤擾하니 나는 가겠소."
민씨가 당시 세도재상이라, 선생의 말이 심히 거슬렸던 것이다.
"지금 쓰는 것이 그 답장이오." 이와 같이 불쾌하게 대답한 후 혼잣말을 하였다.
"근래 외국에 갔다온 사람은 外國節로 왕래하는 데 첩을 대동하고 다닌다."
(당시 그런 예가 있었다)
선생은 민씨가 倭繪 바지에 여송연 피우는 모양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요, 요새 왜회 바지에 여송연깨나 물고 있으면 개화가 다 된 줄로 알아요."
하니, 민씨가 憮然無語하였다.
선생의 안중에는 권문세가가 없던 것이다. (閔泰瑗)
月南 李商在(1850~1929)
종교가, 정치가. 字는 季皓, 號는 月南. 일찌기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 고취에 주력했다.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1888년(고종 25년) 주미 공사 서기로 부임했으며, 귀국 후 右副承旨, 學部, 法部의 協辦, 의정부 참찬을 역임하였다. 1898년(광무 2년)에는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을 지내면서 민중계몽에 전력했다. 뒤에 기독교청년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新幹會長을 지냈다.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複章을 받았다.
牛步 민태원(1894~1935)
소설가, 번역문학가, 언론인.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졸업.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번역한 '哀史'를 매일신보에 연재. <폐허>동인. <조선일보> 편집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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