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백제의 미소(李周熙의 수필)

如岡園 2012. 5. 29. 22:48

 무엇이 바윗돌에다가 피를 돌게 만들었을까. 개심사를 돌아나온 차가 서산 마애불에 도착했을 때는, 불상을 안고 있는 산자락이 온통 참꽃으로 덮여 있었다.

 여래상 앞에 서자, 나는 금방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곧잘 옛날이야기를 해 주던 뒷집 돌이네 할배를 생각했다. 돌이네 할배는 그때 내 또래 손자가 둘이었는데, 아이들이 돌이네 집에 모이면 우리들에게 가끔 어느 효자 이야기-솔개가 물어다 준 고기, 호랑이 타고 얻어 온 홍시,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이야기 같은 것을 해 주었다. 호랑이와 별순이의 이야기도 내가 그때 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 중의 하나인데, 이야기를 듣다가 아이들이 깔깔거리면서 웃기라도 하면, 돌이 할배도 이마에 진 굵은 주름살을 펴면서 따라 웃곤 했다. 여래불의 두툼한 입술과 커다란 눈은, 천생 그때 손자 또래 아이들을 따라 웃던 돌이 할배의 입술이요 눈이다.

 바윗덩어리 전체가 다 미소다. 인바위에 안긴 마애불 하나가, 강댕잇골에 조용히 웃음을 깔고 있다. 부티 흐르는 얼굴에 발등까지 덮인 두꺼운 법의, 반가상 보살에 봉주 보살까지 거느린 본존은,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이내 파안 대소해 버릴 것 같다. 본존불은 입으로만 웃는 것이 아니라, 눈에도 코에도 미소가 묻어 있다.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 천년 전 백제인들은 이렇게 웃었을까.

 골굴사의 여래불이 그렇고 석굴암의 여래불이 그러한 것처럼, 여래상은 대개 근엄해 보인다. 입에 엷게 미소가 묻어 있기는 하나, 속인이 범접하기에는 지나치게 권위적이다. 그러나 서산의 본존불은 절 바깥에 나와 있는 불상이어서 그런지, 골굴사나 석굴암의 여래불처럼 엄숙하지도 않고 성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동네 골목길에서 목마 타고 놀던 개구쟁이들까지도, 스스럼없이 다가설 수 있을 만큼 친근해 보인다. 어찌 보면 장난기까지 있어서, 참배객에게 다가와 시줏돈 좀 많이 놓으라고 슬쩍 농이라도 걸 것 같은 얼굴이다. 본존불이 이렇게 웃고 있으니, 좌우에 앉고 선 협사의 상호에도 미소가 물려 있을 수밖에.

 혹시 골굴사나 석굴암의 여래불이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한다면, 나는 죽기를 무척 두려워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죄지은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만일 나를 심판하는 절대자가 여기 강댕잇골 여래불이라면,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돌이 할배처럼 웃고 있는 본존이, 어렸을 때 길가에 떨어진 동전 한 닢 주워서 엿 사 먹은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따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마애불의 미소에 반해 버려서 그랬던지, 내려오는 길에서까지 연신 웃고 있는 나를 보더니 ㅂ형이, "꼭 로또 복권에라도 당첨된 사람 같다."라며 농을 걸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미술의 꽃이다. 이 탑을 서너 칸 띄워 놓고 보면, 각층에 얹힌 배흘림한 귀기둥과 얇고 넓은 옥개석이, 이 탑을 딱딱한 돌을 깎아 세운 탑이 아니고 마치 물렁한 진흙으로 빚어 세운 탑처럼 보이게 한다. 이렇듯 탑의 소박, 유연한 자태는, 볼이 터질 듯하게 웃음을 물고 있는 강댕잇골 여래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여태까지 이렇게 터놓고 웃는 여래불을 본 적이 없다. 사랑과 미움을 다 고통이라 해 놓고, 석가는 어찌하여 수륙 만리 백제 땅에 와서는 이렇게 데설궂기까지 한 모습으로 서게 되었을까. 돌에다가 이만한 웃음을 깔아 놓은 불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선운산 밑에는 정역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도 왔다가 갔으며, 지리산 기슭에는 왕명을 거역하고 목숨을 걸어 정절을 지켰다는 사람도 왔다가 갔다. 하지만 왔다 하여도 온 것이 아니며, 갔다 하여도 간 것이 아닌 법, 그래서 백제 땅에 온 석가는, 이런 사람들의 시렸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주기 위하여 이렇게 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空)으로 종(宗)을 삼으라고 했다. 국적을 초월한 서동의 사랑, 적지로 끌려가서 죽은 망국의 군주, 황산벌의 오천 결사대, 낙화암의 삼천 궁녀 - 아무리 사비성이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희비와 영욕이 어찌 하나 둘뿐이겠느냐.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다 물거품과 같았던 것. 유마(維摩)는 문수(文殊)에게, 중생은 있는 것도 아닌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했거늘, 그래서 백제 땅에 온 석가는, 천년 뒤에 찾아온 나를 보고서까지도 이렇게 혼자 서서 웃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주희 수필집 '반은 웃음이요 반은 울음인 것을' 에서)

              

     불기2556년 4월초파일을 맞이하여, 대학시절 은혜를 입었던 혜윤스님의 내곡동 소림사를 다녀와서 

                                                        자취생활을 같이했던 나의 畏友 이주희의 수필 '백제의 미소'를 전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