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월남(月南) 선생의 일화(2 /민태원

如岡園 2012. 4. 13. 22:48

     忠憤의 淚

 폐해의 백출로 일시 혁파되었던 轉運司의 復設勅令이 降下되어 관보의 게재를 명할 새,

 선생이 총무국장의 직임으로 이를 거부하여, 필경 생명이 위태하되 小毫도 굴치 아니하다가, 급기 沈宰相 相薰의 委曲한 상주로 천행 칙령의 분포를 정지하게 되매, 선생이 비로소,

 "聲明이 이러하되 可惜타, 보필의 신이 없다" 하며, 방성통곡하니 만좌가 감읍하였다.

 

     너희들이 찍어라

 독립협회 사건으로 경무청에 逮囚되었을 때, 時에 경관이 백방으로 위협 강박하나, 선생은 태연자약하여 마침내 어찌할 수 없음을 보고, 필경은 自服書를 草하여 선생의 도장을 勒印코자 하매, 선생은 懷中에 있던 도장을 내어 멀리 투척하였다.

 "죽어도 내 손으로 도장은 못 찍겠다. 찍으려거든 너희들이 집어다 찍어라."

 하고, 勵聲疾呼하니 그들이 그 正義에 感 선생이 이렇게, 威儀에 습복하여 다만 相顧唐慌할 뿐이더라.

 

     賣官의 代錢을 청구

 선생이 참찬으로 재직할 때, 時에 참정대신 朴齊純이 하루는 선생을 대하여 이렇게 얘기하였다.

 "내가 불가불 위원 기십 명을 쓸 터이니 알아주오. 그리고 영감도 幾名間 쓰시오."

 이와 같이 상의하니 선생은 일차 쾌락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게는 위원이 소용 없으니 代錢을 주시오."

 이와 같이 청구하는지라, 박씨가 당황하였다.

 "내가 무슨 돈이 있어 대전을 드리겠소?"

 선생은 여전히 自若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대감께서는 늘 팔아 자시니까 판로를 잘 아시려니와, 내야 판로를 모르니 소용이 있소?"

 박씨는 말을 듣고 무然無語하였다.

 

     貧家에 國賓이 何事

 정미년의 일이다. 하루는 순사가 선생댁에 이르러 문전을 청결히 하고 황토를 펴라 하여 지휘가 자못 엄혹한지라, 선생이 까닭을 물으니 순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國賓이 오십니다."

 선생은 짐짓 당황한 態를 짓고 집안을 顧瞻하며,

 "내 집에는 접시 하나 반반한 것이 없는데, 국빈이 오시면 어찌하오?"

 그 뜻은 국빈이 민가에 오지 않는 이상, 청결이 어찌 그리 심하냐는 뜻이라, 순사는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말이 없이 돌아섰다.

 

     나는 타고나기를 이렇다

 연전 기독청년회 안에서 소위 '維新會' 라는 일파가 일어나서 '皇城基督靑年會'의 '황성' 2자를 삭제하고, 서양인 선교사를 驅逐하고 일본 組合敎會가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운동이 맹렬히 일어난 때에 하루는 모처로부터 선생에게 권고하였다.

 "돈 5만원을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귀향하여 여년을 평안히 보내라."

 선생은 불연히 作色하고 말하였다.

 "이 돈으로 땅을 사라니 나를 이 자리에서 죽으란 말이지."

 인하여 자리를 차고 일어나면서,

 "나는 하늘에서 타고 나기를 평안하게 일생을 마치지는 못하게 타고났다."

하시니, 그들도 다시 비출 바를 아지 못하였다.

 

     내 몸 편하자고 구걸은 않는다

 선생이 在監時에, 재판장이 선생을 보고 물었다.

 "나가고 싶은가?"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있을 뿐이로다."

 "그러면 보석을 할 터이니 돈 3백 원을 낼 수 있는가?"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 푼전도 없노라."

 "그대가 윤치호와 친하니 그에게 보증금을 구하여보라."

 "내몸 편하자고 남에게 돈을 청구함은 무리한 일인즉 절대로 못하겠노라."

 그 뒤 재판소에서 윤씨에게 교섭하여 석방하였다.

 

     너는 호강을 하는 셈이냐

 옥중에서 나온 선생을 어떤 청년이 노상에서 뵈옵고 이렇게 여쭈었다.

 "선생님,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위문하니 선생이 注視良久에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호강으로 지내는 셈이냐?"

 그 뜻은 대개 지금 우리의 처지가 옥내 옥외의 구별이 없음을 생각하라 함이다.

 

     姓名까지 집행은 너무 심하다

 一自 時局 이후로 선생의 家資는 항상 세금의 강제집행으로 거의 다하였더니, 하루는 경성부윤 모씨가 전근함에 제하여, 府民 중 명망가의 명의로 그 송별연을 발기코자 하여, 선생의 성명을 일차 교섭도 없이 가입한지라, 선생이 이를 들으시고 위연히 탄식하였다.

 "家資의 전부를 집행하여 이제 내 집이 비었거늘 마침내 성명까지 집행함은 너무도 심하다." 하여, 滿座를 失笑케 하였다.

 

     더 두자

 청년회관에서 間隙이 있을 때면 흔히 청년들과 더불어 장기를 희롱하더니, 하루는 局勢가 불리하여 선생이 민궁을 지키고 對手편에 馬, 卒이 있는지라, 馬, 卒을 가진 자가 선생을 향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인제는 지셨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여전히 不肯하며 말하였다.

 "어디 이겼나? 두게."

 몇 번을 行馬한 후 드디어 卒이 궁중에 들어와 呼將을 하매, 선생은 그제야 장기를 놓으며, 

 "인제는 졌네. 아까 將을 부르기 전에야 어디 졌던가?"

 선생은 이러한 유희 중에도 청년에게 항상 무언의 교훈을 베푼 것이다.

 

     그럼 모자 위에다 쓸까

 평생 邊幅을 꾸미지 아니하는 선생은 老來에 더욱 不關하게 되어 매양 동절 혹한의 際에는 재래의 풍등이 위에다 中山帽를 쓰는 일이 많았다.

 하루는 청년회관에서 이를 본 청년이 大驚小怪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중산모 아래에다 풍등이를 쓰십니까?"

 선생은 미소를 띠고 應口反問하였다.

 "그러면 중산모 위에다가 풍등이를 쓰랴?" 하여, 만좌를 실소케 하니 선생의 圓滑應酬가 대개 이러하였다.        

                                                                                                          (閔泰瑗)

月南 李商在(1850~1929)

종교가. 정치가. 자는 季皓, 호는 月南. 한산 사람.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 고취에 주력했다.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1888년(고종 25년)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으며, 귀국 후 右副承旨, 學部, 法部의 協辦, 의정부 參贊을 역임하였다. 1898년(광무 2년)에는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을 지내면서 민중게몽에 진력했다. 뒤에 기독청년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신간회 회장을 지냈다. 1962는 3월 1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複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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