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자전거를 타면서

如岡園 2014. 11. 3. 11:00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전거를 타고 자금성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고 시사하는 바 또한 크다.

 어가(御駕)를 타고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혀 행차해야 할 황제가 경망스럽게도 자전거를 타다니! 말을 타고 유라시아 전역을 제패했던 민족의 후예가 아니던가?

 탈것의 변천은 사회나 국가의 변화사와 맞물린다. 산업혁명 및 자본주의 발전사가 교통수단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근현대사에서 서양의 과학문명은 여러 측면으로부터 다가와 정체된 동양의 문명을 눈 띄웠지만, 자전거와 자동차가 들어와서 우리를 놀랍게 하고 즐겁게 한 것도 그 몫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서양의 발명가들에 의하여 기계공학의 가장 원초적인 원리가 모인 자전거가 태어났다.

 비싸고 시끄럽고 배설물의 공해까지 있는 말이나 마차를 대신하여 인간의 힘으로 높일 수 있는 효율과 안전을 향한 보다 인간적인 기술로 진화한 자전거! 

 그것은 귀족의 장난감으로 출발하여, 자동차를 못 타는 계층의 발로서, 조용하고 깨끗하고 친환경적이며 우아한 드라이브를 꿈꾸는 시민의 애마로 자리매김 되었다.

 걷기보다 빨리, 말보다 조용히 움직여야 할 사람, 모터의 시대가 도래하여 교통에 획기적인 신화를 낳았다고 해도 진정 인간다운 시간을 즐기기 위한 개인의 선택은 자전거의 매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이 실용으로서의 사이클링이건 오락 사이클링이건 경주로서의 사이클링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자전거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것, 말 없이도 원하는 곳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탈것 그것이 자전거이다.

 안장에 앉아 페달을 밟는 행위는 움직임의 완성이자 부드러운 운동의 절정이다. 일단 안장에 앉으면 누구든지 대부분의 시간을 자전거 위에서 보내고 싶어 한다.

 걷거나 타거나 하여 공간을 이동한다는 것은 동물적인 속성이며, 드라이브에 대한 매력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욕구인 것이다. 따라서 자전거나 자동차를 자기 자신이 운전, 운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것이다.

 

 유년의 추억을 들추어 보면 누구나 한 페이지씩 문명의 이기(利器) 하나쯤 갖고 싶어 안달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자전거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대단히 귀중한 물건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마누라는 빌려 줄지언정 어찌 자전거를 빌려 줄 수 있는가' 하는 말이 있었겠는가.

 내가 이런 자전거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60년대 중반, 중등학교 교사 초년시절의 일이다. 제법 짜임새가 있는 중소 도시이긴 해도 승용차나 시내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출퇴근의 교통수단으로서는 이 자전거 만큼 편리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특별한 취미생활을 정착시키지 못했던 입장에서 이 사이클링이야말로 교통수단의 연장선에서 귀중한 오락의 하나이기도 했다. 유년의 소먹이 목동시절, 어른들의 눈을 피해 소잔등을 타고 놀던 유쾌한 감각이 바이서클의 안장에서 되살아날 때의 그 환희!

 걷거나 뛰거나 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바퀴를 굴려 이동하며, 주변의 경관을 샅샅이 살펴보는 탐색의 욕구까지 충족시켜주고 있으니 우아하달 것까지는 없어도 가장 값싼 애마가 아니던가.

 지금 세상이야 유아시절부터 탈것이 많아 아이들을 어른이 타고가는 자전거에 같이 태우고 다니는 것을 보기도 어렵게 되었지만, 유아용 안장을 덧붙여 자녀와 함께 타는 사이클링은 가족애의 표현이자 아름다운 정경이기도 했었다.

 

 교통이 혼잡한 대도시의 도심에서는 보행자나 자동차 운전자에게 자전거는 눈에 가시이기도 하다. 국토의 70퍼센트가 넘는 산악지대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수많은 고갯길은 쾌적한 사이클링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북경을 여행할 때 목도한 드넓은 가로에 쏟아져 흐르는 자전거 행렬을 보고서는 자동차를 운행할 형편이 못 되어서 그런 줄 잘못 알았다. 하이델베르그를 지나면서 목도한 역 광장을 가득 메운 자전거의 홍수. 암스테르담의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자동차는 물론 보행자까지 아예 범접을 못 하도록 규제되고 있었다. 자전거는 이미 현대에 와서도 가장 값싸고 편리한 1인용 교통수단으로 자림매김 되고 있는 것이다. 

 모터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잠시 주춤했던 자전거 문화는 이렇게 조용하고 깨끗하고 친환경적이면서, 걷기보다는 빨리, 진정 인간다운 시간을 즐기기 위해 개인의 선택과 지구와 인간의 미래를 염두에 둔 녹색교통의 대안으로, 여가선용의 수단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문제라면 우리는 매사에 극성스럽고 맹목적으로 덩달아 따라 하는 습성이라 하겠다. 문화의 성장도 경작, 재배, 수양의 과정을 거친 교양이 아니라 맹목과 위세에다 더 큰 비중을 두다가 보니 지칫하면 꼴불견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자전거 도로의 급조, 동호회의 겉치레 행렬, 몇백 만 원짜리 자전거의 출현으로 호사를 부리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부터 나에게 있어 자전거는 거의 소용이 없는 것으로 밀려났다. 소용에는 닿지 않아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놀이기구로 자리매김 된 탈것 중에 이만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어디있겠냐 싶게 자전거는 사랑스런 물건이었지만 추억의 한 페이지로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드라이브에 대한 매력은 아무래도 속도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동차는 최적의 탈것이라는 입장을 부정할 수가 없다. 모터의 힘으로 움직이고 보니 애써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 적당량의 화물을 운송할 수도 있으니 자동차만큼 편리한 탈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드라이버들이 핸들을 잡으면 어디든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도 이 같은 매력이 있으므로 해서이다.

 노령에 접어들면서 자동차 운전을 접었을 때의 그 헌전함을 대신한 것이 나의 두 번째의 사이클링이다.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만 드라이버로서의 욕구충족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전거의 안장에 올라앉으면 나는 보헤미안이 된다. 모든 규범이나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이 된다. 어디라 할 것 없이 달리면 길이 열린다. 삼라만상의 경물을 접하게 되고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시인이 되고 싶고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어지기도 한다. 자전거에 올라 들판을 달리노라면 철 따라 피고 지는 산야초의 파노라마를 무상으로 즐길 수 있어 즐겁다.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상(追想)에 사로잡힌다. 첫사랑의 환영이 떠올라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청년이 벨로시페드(초기 자전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것을 이용하면 사랑하는 소녀에게 보다 빠르고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벨로시페드를 구입하여 타고 사랑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약속 장소로 쏜살같이 달렸다는 일화가 아니라도 사이클링에는 로망이 있다. 

 안장에 앉아 페달을 밟는 행위는 움직임의 완성이자 부드러운 운동의 절정이다. 수고로움이나 지겨움도 없이 마냥 유쾌하기만 한 레저 활동이다. 자전거는 무엇보다도 개인용 탈것으로서 가장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이라는 점에 인기가 높다.

 자전거 라이더는 독립적인 인간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속도감을, 여성들에게는 자유를, 그리고 많은 서민들에게는 즐거움과 실용성을 아무런 대가없이 무제한으로 제공하여 주고 있다.

 

 매사가 다 그렇지만 나는 자전거 드라이버로서도 프로폐셔널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추어에도 미치지 못하고 다만 즐긴다고 하는 것이 형편에 맞은 것이나 아닐지 모른다.

 비위가 밴댕이소갈머리여서, 안전모에 사이클링 복장으로 한껏 차리고 겉멋을 부리는 사이클링 족을 보면 괜히 구역질이 난다. 꼴불견이라는 판단에서이지만 정작 꼴불견은, 읍내 장터걸 술도가 집 배달꾼 모습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나 자신일 것이다.    (2014. 8. 15. 同人誌 <길> 제15호. 如岡 金在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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