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한글날/한글 창제의 동기와 경과/역사적 의의

如岡園 2017. 10. 8. 22:10

          # 한글날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고, 세종의 성덕과 그 위업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일.

 <훈민정음>원본의 말문(末文)에 적힌 '正統 11년 9월 上澣을 근거로 하여, 정통 11년은 세종 28년. 음력 9월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上澣은 上旬이니 상순의 마지막 날이 9일이니, 양력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하였고, 1928년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1932년과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曆書로 환산하여 양력 29일에 행사를 하였으며, 1934년부터 1945년까지는 그레고리오역서에 의하여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28일에 행사를 거행하였다.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말문에 해당하는 날을 추정한 결과 늦어도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까지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고 1946년부터 이날에 행사를 거행하여 오고 있다. 

 기념식을 가지고 세종문화상을 시상하며, 세종의 능인 영능(英陵)을 참배한다. 또한 이 날에 전국학술연구발표회 및 각종 백일장 등이 열리는데, 2016년부터는 새로이 국정공휴일로 지정하여 이 날을 기리고 있다.


          # 한글 창제의 동기와 경과

  세종은 널리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백성을 본위로 한 왕도정치를 베풀었다. 대궐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우수한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토론하며 서적을 펴내었다. 특히 세종은 일반 백성이 글자 없는 생활로 제 뜻을 실어펴지 못함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한문은 남의 글로서 그것을 빌려 우리말을 적는 방법도 매우 어색하여 뜻을 전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은 새 글자를 만들어 낼만한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었다. 첫째, 고려 말기 몽고에 당한 곤욕과 원.명 교체시기에 즈음하여 나라 안에서는 자아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한자를 빌어 쓴 이두문은 품위가 없을 뿐 아니라 체계가 없어 말을 적는데 있어서는 하나도 제대로 전달하기가 마땅찮았다. 셋째, 세종의 개인적인 재주는 새 글자를 만드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넷째, 집현전에는 세종의 이러한 정책을 도울만한 많은 학자들이 있었다. 다섯째,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중국말의 통역을 길러야 하였으며 그들을 과학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중국말의 소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어서 중국 운학(韻學)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운학의 체계는 새 글자를 만들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3년(세종 25년) 음력 12월 세종과 그를 도운 언어학자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즉,'훈민정음'이라는 새 글자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러한 독창적인 글자를 만든 일은 세계역사에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다.


          #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의

 인류의 역사는 언어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의 우리나라에도 언어의 기록이 없지 않았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말할 것도 없으며, 금석문 들과 개인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자로서의 기록이 있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어놓은 기록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우리 조상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바로 전해 주기에는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다. 한 언어는 그것을 모국말로 하여 자라는 겨레의 생각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여러 민족의 생각하는 방식이 모두 약간 다른 것은 그런 데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한문은 그 어휘체계나 문법체계에 있어서 중국말이지 우리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에 대한 한문으로 된 기록은 바로 우리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 아니라 중국 사람의 눈에 비친 우리 조상의 모습을 그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살아움직이는 참된 모습은 거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기록들은 그 양이 아주 적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기록 당시의 언어를 복원하기는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에 대한 참된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 때부터 우리 겨레의 살아움직이는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게 되며 그 생생한 감정의 움직임을 우리는 바로 피부로 느끼게 된다. 참된 역사 시기가 열리며 참된 국문학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말 자체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부터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참된 우리 겨레의 역사시대의 출발을 의미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를 긋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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