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에는 주기가 있고 리듬이 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번데기로 변하는 곤충이 그렇고, 신진대사의 과정도 그러하며, 돋는 해 지는 달 천체의 운행은 물론 춘하추동으로 변환하는 계절도 그렇다.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살이 역시 그 리듬을 좇아 일정한 주기로 구획하여 그 틀에 맞추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사람의 한평생은 한 곳에 있지 않고 물레바퀴가 돌아가듯 돌아서 옮아가는 것이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며 쥐구멍에 볕들날도 있는 이치와 똑같다.
계절의 순환과 만물의 재생, 세상의 온갖 물질과 세력은 인과법칙에 따라 변화해 간다. 식물의 씨는 땅 속에서 발아하여 나와 성장하였다가 다시 씨가 되며, 해와 달 또한 밤이면 숨었다가 낮이면 나타난다. 수레바퀴가 돌아가며 나아가듯이 이러한 주기적 순환은 새로운 생성과 활력을 부여하여 단절을 막는다.
인간살이에서 순환과 생성의 리듬을 규격화하여 가늠하는 것으로 달력이 있다. 사람이 생활의 주기적 과정을 확실히 하기 위한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시령(時令)을 좇아 날짜를 따라 적어놓은 것이 달력인 것이다.
통상적으로 달력이나 캘린더라고 하지만, 달력이면 달의 주기를 중심으로 한 월력(月曆)이고, 태양을 중심으로 한다면 일력(日曆)이 된다. 또 천체를 측정하여 해와 달의 움직임과 절기(節氣)를 적어 책으로 엮어 놓으면 역서(曆書)로서의 책력(冊曆)이 된다.
H.D 솔로우는 '숲속의 생활'에서 달력은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 있는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 하였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채벌군과 같은 삶에서는 그럴법도 한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캘린더(Calendar)는 라틴어로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던 것이다. 로마에서 금전 대차관계를 매달 그믐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어서 결국 금전 출납부가 달력을 의미하는 말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항시 새롭게 태어나는 재생과 무궁한 힘, 만물의 재생과 계절의 순환에 맞추어 달력이 생겨난 것이다.
역서(曆書)가 생겨나기 이전의 생활은 자연력(自然曆)이 생산력(生産曆)을 규제하고 그 생산력에 따라 연중 행사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단조로운 생활과정에 리듬과 질서가 주어졌다. 봄에 씨를 뿌리고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가을에 수확을 하면서 감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심정이며 여기에서 연중 행사는 주술적 의례로 정립되어 달력에 정착되었다.
그러나 인지가 발달되어 감에 따라 생활의 리듬이 시계성(時季性)에 의해 제약되는 것보다 인간의 자율에 의해서 주도되는 경향으로 기울어져 자연력(自然曆)의 의존도가 약화되고 자연력에서 진화된 문자력(文字曆)을 갖게 되면서 달력은 다변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늘의 해가 떠서 지는 것을 표준으로 하루해를 1일로 삼고,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성으로 한달을 헤아렸다. 우리나라 역법(曆法)은 1895년 태양력(太陽曆)을 채용하기까지는 태음력(太陰曆)을 써 왔으며, 농어촌 생활에서는 음력을 중심으로 생활하여 왔기에 문제가 복잡한데다가 태양년(太陽年)을 황경(黃經)에 따라 24등분한 절기의 표시와, 천간(天干), 지지(地支), 60갑자(甲子), 태세(太歲), 월건(月建), 일진(日辰)의 구분으로 양태가 다양하다. 그러면서 일찍부터 외래력(外來曆)을 받아들여 7일 주기(週期)는 보편적 사실이 되었지만 얼토당토 않은 서양 명절의 맹목적 수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
"산중에 책력 없어 철 가는 줄 모르노라 /꽃 피면 봄이요 잎 지면 가을이라 /아희들 헌 옷 찾으면 겨울인가 하노라". 이런 시조같은 세월, 그런 시절 사람팔자라면 몰라도 시간의 틀, 생활의 구조 속에 한 부품으로 끼이어 사는 현대인에게야 달력은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을 살아가는 나그네길의 이정표가 되었고 그래서 그걸 들여다 보고 살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 '하선(夏扇) 동력(冬曆)으로 시골에서 생색 낸다.'고 하였으니 예전에도 달력 선사로 인사를 치렀던가 보다. 금년에도 얼마 있지 않으면 새 달력이 나올 것이다. 달력은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되니 달력인심 같으면사 살맛이 난다. 그러나 달력도 달력 나름이어서 자기에게 마땅한 것을 얻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戊子년 쥐의 해가 목전에 다가섰다. 2008년 신년 카렌다는 또 어떤 것이 걸려들지 기대를 하여 본다.
절에서 나온 달력에는 목탁소리가 나고 교회에서 나온 달력에는 찬송가 소리가 들린다. 은행에서 나온 달력에는 계좌번호가 어른거리고 대학에서 나온 달력에는 신기루가 얼비친다.
달력만큼 간사스러운 물건도 없을 것이다. 미농지 같은 얇은 종이로 만들어 1년 365일을 한 장씩 뜯어내어 화장지로 쓰도록 한 일력도 있었고, 팔등신 미녀의 알몸을 거의 등신대(等身大)의 크기로 사진박아 내어논 주류광고 달력도 있었으며, 고급 인화지에 이국 풍경이 휘황찬란한 무역회사 달력도 있었다.
아무리 작은 동네 구멍가게일지라도 간판만 붙일 정도라면 카렌다를 찍어 돌려야 장사가 되는 줄 알았고, 가정집 빈 벽에는 그만그만한 그림의 달력이 붙어야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줄 알았던 시대가 있었다.
달력 선물이 인색해질 때쯤에는 이미 경제적 성장동력이 추진력을 잃어가고 있는 증좌였다. 달력의 수요나 형상이 무서운 속도로 변신한 데는 수요층의 기호도 한 몫을 한 셈이다. 크기가 작아지면서 탁상으로 주저앉았고, 전자과학의 발달로 핸드폰 LCD 액정 문자판속으로 숨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답답하게 된 것은 달력에 나타나는 기록내용이다. 음력과 일진과 절기와 세시(歲時)와 풍속일(風俗日)을 알아보려면 특정 달력을 구해야 하게 된 것이다. 참신하다 싶은 카렌다에는 태음력(太陰曆)의 표시조차가 인색한 반면, 이력도 족보도 모를 생뚱맞은 기념일이 바리바리 얽혀 있어 마음이 상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라 명절을 정하여 생활 과정에 리듬을 주면서 살아왔다. 생활환경이 바뀌어 그것을 굳이 오늘에 따라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문화에 대한 인식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볼 때, 달력을 통해 짚어봐야 할 문제가 많다. 원단(元旦)과 입춘(立春)은 달력의 기점이요, 三月三日, 五月五日, 七月七日, 九月九日은 중일(重日)이며, 上亥日, 上子日, 卯日, 巳日 같은 것은 간지(干支)와 음양사상(陰陽思想)에 의한 절일(節日)이 아니던가.
正月元日, 立春, 上元, 二月朔日, 三月三日, 寒食, 四月八日, 五月端午, 六月流頭, 初伏, 中伏, 末伏, 七月七夕, 八月秋夕, 九月九日, 十月五日, 十一月冬至, 十二月臘亨, 除夕, 등 명절일의 명기(銘記)는 우리 달력에 필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바람달이라고 음력 2월 혼사를 꺼리고, 돼지해는 복년(福年)이라고 돈벼락을 바라며, 백말띠 딸년 팔자 세다고 출산 꺼리면서 원숭이해 머리 좋다고 출산율 증가하는 민족이, '바렌타인 데이' 찍힌 달력에 동그라미 쳐놓고 날짜 놓칠세라 조바심하는 꼴이 되어서야 어이 될 일인가.
2008년 1월 1일 신년 벽두 인사에도 그날부터 당장 戊子년인 양(戊子년은 2008년 2월 7일부터 시작된다), "무자년 쥐띠해가 밝았습니다."하고 어김없는 헛인사를 또 하게 될 것이다. (同人誌 길 8호)
如 岡 김 재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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