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배기'라는 말은 소나무 등속 관목의 그루터기 썩은 밑뿌리를 두고 일컬은 경남 안의지방의 사투리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조부님의 별명이 '고자배기 영감'이었다. 조부님의 별명이 그렇게 붙여진 연유는 고자배기를 캐어서 땔나무감을 장만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소나무 그루터기 밑뿌리를 파낸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인내심과 집념 없이는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런 힘든 일을 무릅쓰고 고자배기를 캐었던 것은 무리없는 방법으로 양질의 땔나무감을 장만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내가 여덟살 때인 해방 직후의 피폐한 한국 농촌 사회는 땔나무까지 문제가 되었던 시기였다. 생소나무를 베어 화목(火木)으로 한다는 것은 이미 왜정 때부터 법으로 금지되었던 상황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법을 어겨가면서 민둥산의 소나무를 마구 베어 땔나무를 장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조부님께서는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셨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 시절 가장 현명한 연료대책이 왜정 때 베어낸 소나무 밑둥 고재배기를 캐어 땔감으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소나무 고자배기에는 송진이 축적되어 있다. 송진이야말로 소나무라는 식물이 저장하고 있는 석유같은 기름기를 가진 연료라는 것을 조부님은 간파하고 계셨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실속도 없는 땔감 마련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조부님은 고자배기를 캐어 쌓아두고 있었으니 우리집은 그 당시로 봐서 양질의 연료를 축적하고 있는 가정이었다. 남들은 엄두도 못낸 소나무 고자배기를 캐어 연료를 마련하는 발명가적 기질이 있었으니 고자배기 영감이란 별명이 붙을 만하다.
그러한 조부님은 부지런한 농부이시기도 하다. 농부는 눈만 뜨면 논밭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생철학이었다. 아침에는 천장이 밝을 때까지 늦잠을 자서는 안되고, 논밭에 엎드려서는 비록 해거름이 될지라도 키우고 있는 곡식이 안 보이는 땅거미가 질 때까지 일을 하는 정성이 없으면 충실한 추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였고 또 그렇게 실천하셨던 것이다.
게으른 농부 낮잠자기가 제격인 비오는 날일지라도 새끼꼬기, 짚신삼기, 솔뿌리로 바가지 깁기에 영일이 없었고, 왕골농사를 지어 돗자리를 손수 짜는가 하면, 꽃신을 만들어 설 추석 명절에 호사를 시켜주는 솜씨까지 있는 분이기도 하다.
근검 절약하기로는 이루 비길 데도 없다. 글을 읽거나 길쌈을 하는 등 일을 할 때가 아니면 늦게까지 호롱불을 켜고 있어서도 안되고, 담배불을 붙이는 일에도 성냥을 그어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대삿갓 살가지 끝에 유황을 붙여 화롯불에 당겨 붙이거나 부싯돌에 당긴 불씨를 썼다.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 구정물에는 그것이 비록 소 돼지의 먹이가 될지라도 밥알이 떠 있어서는 안되고, 콩타작 밀타작 마당에서는 멀리 튀어나간 콩알 하나 밀알 하나까지 남김없이 줍게 하는 엄정한 분이셨다. 구두쇠라거나 자린고비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대문 밖에 거지가 오면 배고프지 않게 한 술이라도 더 얹어주라는 주장이셨다. 밥알 하나 밀알 하나가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홀하게 여기는 마음이 곡식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발상인 것이다.
내 조부님과 같은 애연가 애주가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담배골초라든가 술꾼이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 나름의 한계를 명확히 그어 기호(嗜好)하신 게 아닌가 싶다. 손수 경작한 엽연초와 밀주로 빚은 농주는 필수품이었다. 주무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손을 놓고 있는 시간은 없었으니 담배를 피거나 농주를 마시는 시간이 잠간의 휴식시간이다. 그것도 술은 시시때때로 드시는 것이 아니라 들일을 나간 아침나절 쉴참에 딱 한 잔, 저녁나절 쉴참에 딱 한 술잔 이렇게 하루 두 번이다.
어쩌다가 장문에 나서 친구나 사돈을 만나 과음을 하시고 난 뒤 늦게 돌아오실 때, 내가 동구 밖으로 마중을 나가 부축을 해드리려고 하면 술취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일거에 거절이시다. 남부끄럽다는 것이다.
성내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것을 속으로 삭일 때는 애연하는 담뱃대로 재떨이를 두드려대는 것으로 내심을 발산하곤 하시는 것이었다. 남에게는 관대했지만 스스로에게는 엄정하여 준법정신에 투철했다. 그러면서도 두 가지 면에서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담배와 술이다. 따지고 보면 그 때의 법 설정이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자기 집에서 담배를 경작하면서 굳이 전매청의 비싼 담배를 사서 피워야 하고, 농사지은 쌀과 누룩으로 여느 음식과 같이 집에서 빚어 음식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고 마시는 술을 굳이 특권받은 양조장에서 빚은 술로 사먹으라니 그런 횡포가 어디 있는가.
조부님께서는 왜정 때 아편 위탁경작권을 얻어 한 해에 야구공 만한 아편 원액을 두 뭉테기씩 공납하기도 했는데, 가정에 상비약으로 작은 구리무통에 조금씩 남겨두고 설사를 하거나 발열을 할 때 파리머리 만큼의 극소량을 처방하여 물에 타 마시면 즉방의 효과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웃마을의 만주에서 돌아온 아편중독자가 넘직거려 성가시게 한 것도 그 시대의 한 풍정(風情)이었다.
조부님은 그야말로 주경야독하는 서생(書生)이시기도 하였다. 선비 축에 들었다기보다는 양식이 있고 지혜가 있는 생활인으로서의 식견 있는 지식인이었다. 화중(花重)이라는 본명이 있었지만 인선(仁善)이라는 자(字)로 더 잘 통하였다. <한훤차록(寒喧箚錄)>, <요람잡초(要覽雜艸)> 같은 책을 손수 필사하여 두고 황도길일(黃道吉日), 생기일법(生氣日法)을 점치었고, 방소법(防所法), 여자혼운개폐법(女子婚運開閉法), 천지대통일(天地大通日), 성조길흉법(成造吉凶法), 태초법(胎焦法), 잉태지남녀법(孕胎知男女法), 복단일(伏斷日), 좌지법(坐地法), 하시법(下時法), 삼재지법(三災知法), 삼재소멸법(三災消滅法), 이사대흉월방(移徙大凶月方), 구랑성소재방(九狼星所在方), 병인사생지법(病人死生知法), 지적인법(知賊人法), 산신하강일(山神下降日), 신황정명방(身皇定命方), 남녀가취합궁법(男女嫁娶合宮法), 동방삭시절증험방(東方朔時節證驗方), 생사갑순법(生死甲旬法), 성조삼상법(成造三桑法), 조가팔룡길흉법(造家八龍吉凶法), 수출문로법(修出門路法), 재의길흉법(裁衣吉凶法), 시간평생법(時看平生法), 출행법(出行法), 성조입주하예방법(成造入柱下預防法), 기포법(起胞法), 오성인이거흉방(五姓人移居凶方), 생사문법(生死門法), 천기개문법(天氣開門法), 택시법(擇時法), 득신법(得辛法), 목화풍흉법(木花豊凶法), 궁합대기(宮合大忌), 구산생왕방법(舊山生旺方法) 등을 터득하여 필요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곤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성장한 송아지의 코 뚫는 날자까지 길일을 가려 실천하는 민속의 생활인이었고, 정월 대보름 이른 아침이면 훌기대로 울타리를 쳐 새를 쫓는 흉내를 내게 하여 곡식을 축내는 참새가 번성하지 않는 해가 되기를 기원했고, 마당과 마굿간에는 계견(鷄犬)이 번창하고 우마(牛馬)가 득실거리도록 '워리 한마당' '구구 한마당'을 외치게도 하신 분이 고자배기 영감이다.
택일 궁합 사성(四星)이 필요한 사람은 우리집에 모여들곤 하던 것이 60년이 지난 오늘 내 눈앞에 버언하다. 그런 가운데 유독 나의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부적(符籍)에 관한 것이다. 동목부(動木符), 동토부(動土符), 가명부(家鳴符), 침두부(砧頭符), 안택부(安宅符), 벌목부(伐木符), 조왕부(조王符), 세장부(歲將符), 삼응축삼재부(三鷹逐三災符), 삼살오귀방부(三殺五鬼方符), 초학부(草학符), 잡귀목신퇴거천리부(雜鬼木神退去千里符), 축사부(逐邪符), 사방무방소부(四方無方所符), 소병증수복부(消病增壽福符), 을기부(乙奇符), 병기부(丙奇符), 정기부(丁奇符), 성조부(成造符), 태세방동토부(太歲方動土符), 시병조왕부(時病조王符), 화재불침부(火災不侵符), 대장군동처부(大將軍動處符), 동정부(動井符), 동석부(動石符), 태신부(태神符), 신가입부(新家入符), 노중득병천길부(路中得病天吉符), 치통부(齒痛符), 제신위거부(諸神違去符), 맹신부(盲神符)를 정교하게 그려 비치해 두시고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사(朱沙)로 그려 주시곤 하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린 나에게 부적의 모사(模寫)를 시켜, 주사에 침을 발라 재미있게 그려내었더니 기특해 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한훤차록(寒暄箚錄)> 가운데는 '퇴계선생도덕가'도 있었다. 각종 한훤류의 서식(書式), 서격(書格)과 품격 있는 문자류, 축문, 진언(眞言), 영산법(影算法), 오성분관(五姓分管), 방술(防述), 부적(符籍) 등 그 당시 현실적인 생활상식들을 기록해 둔 이 책에 유독 이 시가가 수록된 것은 조부님의 또다른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이러한 고자배기 영감은 육친에 대한 자정(慈情) 또한 남달랐다. 선진의식 개명사상을 가지고 일본으로 진출한 외동아들을 굳이 당신의 품안으로 불러들여 반거치기로 일생을 묶어두었던 것도 당신 나름의 육친애에 대한 애착의 결과였다.
맏손주인 나에 대한 애정은 기특함에서 비롯된 관용과 아량과 배려로 일관한 무한량의 그 무엇이었다. 다섯살인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깨치기가 바쁘게 국민학교 시절까지 <계몽편> <동몽선습> <소학>을 손수 가르쳐 터득시키고는 신식교육의 흐름에 맡겨두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의 경제적 후원자로서의 역할까지도 톡톡이 하셨다.
내가 1961년 당시, 전국에 3개 밖에 없었던 명문의 4년제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하고도 5.16 전후의 어지러운 사회 현상에서 병역미필로 교사 발령을 못받고 실의에 찬 귀향길에 접어들었을 때, 진심어린 격려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던 것도 이 '고자배기 영감'이라 칭한 조부님이었다.
1961년 8월 8일, 일흔 둘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을 때, 창자가 끊어질듯 울먹였던 것도 단순히 손자와 조부라는 육친애적 관련성을 넘어선, 소박하고도 거룩한 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에서였다.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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