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 구름을 보라! 구름은 유유히 바람에 따라 흐르고 있다. 그리고 바람에 따라 뭉쳤다 흩어졌다 자유 자재이다. 그러나 구름의 자태는 변함이 없다. 이 구름의 모양은 스스로를 바람에 따라 맡기면서 어디를 가나 스스로가 주인이 된다. 사람도 어떠한 경우, 그리고 어떠한 운명에 흔들려 가더라도, 그 경우에 따라 그 운명에 따라주인이 된다면, 세상의 걱정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도처에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아가라는 것은 아니다. 낙엽같이 검불같이 아무데나 몸을 던지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그가 부닥친 운명을 변경할 수는 없는 이상, 그 운명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아니, 운명을 변경하기 위해서 모든 경우, 모든 운명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즉 운명에 끌려 가지 말고 운명을 타고 가라는 말이다. 운명을 타고 가는 사람은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죽기를 원하지 않고, 또 죽기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바다로 향하여 흐르는 물을 보라! 물은 그 앞에 놓인 골짜기와 바위와 들판을 이리 비키고 저리 비키며 지형에 따라 몸을 맡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갈 길을 찾아가고 있다. 때로는 장애물로 인해서 잠시 바다와는 정반대 방면으로 치올라 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는 잠시 그와같이 처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드러우면 융통이 자재롭고, 동시에 모든 것에 걸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없이 부드럽지 않고는 한없이 강하지 못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동양 명언>
오늘 밝은 이 아침 이 순간에 당신의 행동을 다스리라! 순간의 일이 당신의 먼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오늘 당장 한 가지 행동을 여무리라. 과거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으로 갈아 타야 한다.
오늘 그릇된 하나의 습관을 고친다는 것은 당신의 새로운, 그리고 좀 더 강한 성격으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성격은 새로운 운명을 열고 나갈 것이다. <릴케>
인생은 하나의 투쟁 속에 있다. 그러나 싸울 상대는 자기의 운명이다. 인생의 길은 멀고, 가야할 길은 좁다. 이것이 운명이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하는 자만이 운명에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 명언>
나는 내 마음을, 참는 데에는 강하게 키우며 욕심 쪽으로는 둔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나도 여러 사람 만큼의 욕심과 소원은 있다. 그러나 그 욕심이나 소원은 언제나 내 분수를 생각하고 사양하면서 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나는 조금도 자기를 비하(卑下)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생활이란 향상을 지향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나는 내가 구할 수 있는 방향에서 내가 손 닿는 것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가 걸어가는 길을 남이 굽신거리고 길을 비켜 줄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 나의 신분이나 취미로 보아서 나는 중간 쯤 위치가 가장 알맞다. 나는 무리하게 높이 오르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한 편으로 보면 패기가 적다고 할지도 모르나,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그 높고 얕은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마음이 편한가 편하지 않은가로써 선택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평(平)한 운명을 따라 갈 뿐이다. 그것이 또 내 양심에 맞기 때문이다. <몽떼뉴>
당신이 남한테 공로가 있거든 그 보수를 바라서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당신이 만약 남한테 과실이 있거든 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언젠가는 그것을 갚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남에게서 받은 은혜는 잊어버리고 남한테 대한 원한의 감정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운명을 슬프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사람이 끈끈하게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큰 길로 향할 수 있는 자기의 운명을 좁은 골목으로 몰아 넣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불우할 때가 있고, 또 원한을 품게 되는 한 두 가지 경험이 있다. 그 괴로운 일들을 하나의 시련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시련을 견디고 이기지 못하면 운명에 휘둘리게 된다. <로런스 굴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해서 생활을 짓밟고, 생활에 대한 걱정으로 해서 죽음을 짓밟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면할 길이 없으나,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음에 대한 준비는 아니다. 불과 15분 가량의 고통이면 그만일 뿐, 죽음의 순간에 대한 준비를 오래 전부터 할 필요는 없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하지만, 죽음이 인생의 막이 내리는 순간일망정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죽음이 인생의 목표가 아닌 이상,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필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이 점에 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죽음도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살가 하는 전체적인 문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사는 목적도 산다는 그 자체가 아니면 안된다. 신은 누구에게나 온전한 행복을 주지 않으며, 또 온전한 불행도 주지 않는 성싶다. 나는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나, 그래도 여러 가지 괴로운 일에 부닥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불행한 운명 앞에 나는 조용히 참기로 했다. 또 불행한 운명의 경험이 나에게는 참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괴로운 운명에 대해서는 참는 것이 가장 좋은 대항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몽떼뉴>
사람은 대개 사상의 싸움보다 성격의 충돌로 원수를 만든다. <발자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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