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
한흑구
눈이 내린다.
한 이파리, 한 이파리 하이얀 눈이 무슨 잔벌레인 양 뒷산을 넘어오는 찬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날아온다.
세상은 온통 하루살이 벌레들의 무늬로 물들고 있는 듯하다.
크게 확대해서 볼 때에는 별 모양도 하고, 꽃 모양도 한다는 그림을 언젠가 한 번 보았기에, 날아오는 그 한 놈을 손바닥 위에 잡았더니 볼 사이도 없이 그만 물방울이 되었다가 풀어진다.
한 이파리씩 내리던 눈이 펑펑 하늘을 덮고 쏟아진다.
뺨을 때리고 스치는 눈도 그리 찬 것 같지 않다.
사실, 눈은 찬 것이 아닌가 보다.
산과 들을 덮어 주고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모든 생명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커다란 이불 같은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눈이 아닐까?
눈은 따스한, 하얀 솜 같은 이불이다.
4월의 아늑한 대기와 흐뭇한 바람과 따스한 태양을 꿈꾸면서 쫑긋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꽃 움들을 눈은 흰 이불로써 고요히 덮어 준다.
8월의 태양을 꿈꾸면서, 하늘 높이서 떨고 섰는 포플러의 움들과 수양버들의 움들도, 눈은 다같이 흰 이불로써 따뜻하게 덮어 준다.
눈은 푸르른 대와 파아란 솔잎들 위에도 사뿐사뿐 내려앉아서, 그 희고, 맑고, 깨끗하고, 밝고, 부드럽고, 고운 꽃송이들을 피워 놓는다.
산에, 산에, 들판에, 푸른 대에, 또한 푸른 솔에. 그 맑고 희고 고운 꽃송이들이, 눈송이들이 피어나고, 커가고, 빙그레 웃다가, 그만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려서 흩어진다.
흩어지고 피고, 피고 흩어지고, 눈은 온종일 소리 없이 내린다.
눈은 또한 먼 뜰 앞, 언덕 위에 깔린 누런 잔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들과 벌레의 알들도, 다같이 흰 이불로써 고이 덮어 준다.
냉이와 달래의 속잎들도, 민들레와 할미꽃의 가는 뿌리들도, 눈은 다같이 따스한 이불로써 가리어 준다.
지금.
오늘의 사명을 다 마친 듯이, 눈은 소리 없이 내리고, 소리 없이 그친다.
산에, 벌에, 나무 위에, 또한 지붕 위에, 흰 눈은 이제 온 누리를 덮었다.
참으로 커다란 이불이다.
지금.
이 희고, 맑고, 깨끗하고, 따뜻한 이불 위로 불긋한 겨울 해가 천천히 흰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
7색의 무지개와 같은 영롱한 빛을 이끌고 흰 이불 위에 비스듬히, 또한 기다랗게 수를 놓으면서, 겨울의 차가운 태양은 그의 얼굴을 감추고 있다.
깃으로 찾아가는 까마귀들의 떼는, 흰 이불 위에 유달리도 더 검어 보인다.
(1955년. 韓黑鷗)
한흑구(韓黑鷗. 1909-1979)
수필가. 번역문학가. 교수. 평양 출생.
1929년 도미하여 시카고의 노스파크 대학에서 영문학을, 템플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
귀국하여 종합지 <태평양>과 문예지 <백광>의 창간을 주재.
독립운동 단체였던 흥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음.
1945년 월남하여 수필 창작에 몰두.
미국 문학에 관한 평론을 발표하고, <동광> <개벽>에 흑인 시를 최초로 번역 소개함.
6.25 때 포항으로 피난갔다가 그대로 안착, 교편 생활,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정년.
수필집 <동해 산문> <인생 산문> 등이 있음.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吳 一 島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저- 황막한 벌판을 희게 덮어다오
차디찬 서리의 毒盃에 입술 터지고
무자비한 바람 때없이 지내는 잔 칼질에
피투성이 낙엽이 가득 쌓인
대지의 젖가슴 포-트맆 빛의 상처를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저 앙상한 앞산을 고이 덮어다오
死骸의 寒枝 위에
까마귀 운다. 금수의 옷과 청춘의 육체를 다 빼앗기고
寒威에 쭈그리는 검은 얼굴들
눈이여! 퍽 퍽 내려다오 태양이 또 그 위에 빛나리라
가슴 아픈 옛기억을 묻어 보내고
싸늘한 현실을 잊고
聖域의 새 아침 흰 淨土 위에
내 靈을 쉬이려는 希願이오니
(1935년 4월 <詩苑> 2호)
오일도(吳一島. 1901-1946)
시인. 경북 영양 출생. 본명은 熙秉. 一島는 雅號.
1929년 일본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 졸업. 1935년 시 전문잡지 <詩苑> 창간.
1942년 낙향하여 '瓜亭記' 등 수필을 쓰면서 암울한 일제 말기를 칩거.
광복 후 상경하여 <詩苑>의 복간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기조 위에 애상과 영탄이 交織되고 있는 경향.
지성으로 감정을 절제하기보다는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에 역점을 둠. 그리고 거기에 깃든 애상과 영탄은 그로 하여금 어둡고 그늘지고 암울한 정서를 주로 노래하게 만들고 있음.
위의 시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에서 '서리의 독배에 터진 입술' '피투성이 낙엽' '대지의 상처' 와 같은 심상을 통해서도 낭만과 애상 그리고 영탄이 얽힌 암울한 정서를 엿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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