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送年/皮千得

如岡園 2010. 1. 7. 12:02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새색시가 김장 삼십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는 인생. 우리가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은 그다지 애석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모(歲暮)의 정은 늙어가는 사람이 더 느끼게 된다. 남은 햇수가 적어질수록 1년은 더 빠른 것이다.

 나는 반 세기를 헛되이 보내었다. 그것도 호탕하게 낭비하지도 못하고, 하루 하루를 일 주일, 일 주일을 한 해, 한 해를 젖은 짚단을 태우듯 살았다.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보람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여 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학구에 충실치도 못했다. 가끔 한숨을 쉬면서 뒷골목을 걸어오며 늙었다.

 시인 브라우닝이 <베네세라 선생>이란 시에서 읊은 것과는 달리, 나는 노경이 인생의 정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렇다고 시인 예이츠와 같이 사람이 늙으면 허수아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사십부터' 라는 말을 고쳐서 '인생은 사십까지' 라고 하여 어떤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은 사십부터도 아니요, 사십까지도 아니다. 어느 나이도 다 살만하다.

 백발이 검은 머리만은 못하지만, 물을 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온아한 데가 있어 좋다. 때로는 위풍과 품위가 있기까지도 하다. 젊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천하고 추한 것이다.

 젊어, 열정에다 몸과 마음을 태우는 것과 같이 좋은 게 있으리오마는, 애욕, 번뇌, 실망에서 해탈되는 것도 적지않은 축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많이 겪은 뒤에 맑고 침착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회상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을 계산에 넣으면 늙음도 괜찮다. 그리고 오래오래 살면서 신문에서 가지가지의 신기하고 해괴한 일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므로 나는 '일입청산만사휴(一入靑山萬事休)' 라는 글귀를 싫어한다.

 "할아버지!"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듣고 나는 가슴이 선뜩해졌다. 그러나 금방 자연에 순응하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려서 할아버지라는 사람의 종류가 따로 있는 줄 알았었다. 며칠 전 그 아이에게도 내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랜드 올드 맨'이란 말이 있다. 나는 노대가(老大家)는 못 되더라도 '졸리 올드 맨(好好翁)' 이 되겠다. 새해에는 잠을 못 자더라도 커피를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도록 노력하겠다. 눈 오는 날, 비 오시는 날 돌아다니기 위하여 털신을 사겠다. 금년에 가려다가 못 간 설악산도 가고 서귀포도 가고, 내장사 단풍도 꼭 보러 가겠다.

 이웃에 사는 명호를 데려다가 구슬치기를 하겠다. 한 젊은 여인의 애인이 되는 것만은 못 하더라도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하는 데 힘이 들지 않아 좋다. 하기야 지금은 젊은 여자에게 이야기하기도 편해졌다. 설사 말이 탈선을 하더라도 늙은이의 주책으로 돌릴 것이다. 저편에서도 마음놓고 나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선생님 뵙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하고 편지가 자유롭게 우리 집 주소로 날아오기도 한다.

 올해가 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다지 슬퍼할 것은 없다. 나의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내 병은 자기와 술 한잔 마시면 금방 나을 것이라고 하니, 그와 적조하게 지내지 않는 한 나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춘(早春) 같은 서영이가 시집갈 때까지 몇 해 더 아빠의 마음을 푸르게 할 것이다.    (피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