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만년><장수>/皮千得

如岡園 2010. 2. 1. 12:41

     만년(晩年)

 어려서 잃었으나 기억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계시고, 멀리 있어도 자주 편지를 해주는 아들딸이 있고, 지금까지 한결같이 지내온 친구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쫓아와 반기는 제자들이 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비록 오막살이라도 누추하지 않다'는 옛글이 있다. 늙은 아내 탓을 하지만, 기름 때는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분에 넘치는 노릇이다. 그리고 긴긴 시간을 혼자서 가질 수 있는 사치가 있다. 젊어서 읽었던 <좁은문> 같은 소설을 다시 읽어도 보고 오래된 전축으로 쇼팽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평온을 송구스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來世)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 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장수(長壽)

 비 오는 날이면 수첩에 적어두었던 여배우 이름을 읽어보면서 예전에 보았던 영화 장면을 회상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때로는 미술관 안내서와 음악회 프로그램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지도를 펴놓고 여행하던 곳을 찾아서 본다. 물론 묶어두었던 편지들을 읽어도 보고 책갈피에 끼워둔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30년 전이 조금 아까 같을 때가 있다. 나의 시선이 일순간에 수천 수만 광년(光年) 밖에 있는 별에 갈 수 있듯이, 기억은 수십 년 전 한 초점에 도달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와 그 별 사이에는 희박하여져가는 공기와 멀고 먼 진공이 있을 뿐이요, 30년 전과 지금 사이에는 변화 곡절이 무상하고 농도 진한 '생활'이라는 것이 있다. 이 생활 역사를 한 페이지 읽어보면 일년이라는 것은 긴긴 세월이요, 하룻밤, 아니 5분에도 별별 사건이 다 생기는 것이다.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였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진 보물의 세목(細目)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의 과거를 사는 데 있는가 한다.

 

 

# P.S "수필은 靑瓷 硯滴이다. 수필은 蘭이요, 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

 학술적인 정의나 논리적인 이론을 내세우지 않고 여러가지 비유를 곁들여 수필이 어떠한 문학이냐를 잘 알려준 琴兒 선생. <만년>과 <장수>는 선생의 여러 수필 중 아주 짧은 작품이지만 지금의 내 속내를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낸 것같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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