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초 예찬(乾草禮讚)
마른풀의 향내, 프랑컨 평야의 어린 시절부터의 구원의 향기여!
그 시절, 뜨거운 여름날이면 프랑컨의 잘레 강 계곡과 마인 강 유역의 풍경은 온통 이 향기로 뒤덮였었다. 어스럼 황혼이 되면 내려오는 밤의 촉촉한 습기 속에서 그 향내는 유난히 짙고 격렬했다. 이런 무렵이면 소년의 가슴은 언제나 뒤집히듯 설레고는 했다. 이 끈끈하고 짙은 향내 속에서는 또 다른 향내가, 땅 밑의 입김이 서려 부동(浮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상 속에서의 여행의 향기,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다가 던져 놓고 간 마른 해조의 알알한 향기, 서랍에서 끄집어낸 지도에서 나는 곰팡이 얼룩의 향기, 유랑민이 거두어들인 포도의 향기, 칙칙폭폭 떠나가는 기관차가 남겨주는 축축한 유황의 냄새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렁컨 농가의 광에서 나는 마른풀 냄새는 구원의 향기이다. 매혹적인 대들보 밑의 서늘한 기운. 햇빛 비친 한 송이 수련 뿌리 위로 정기(精氣) 있게 어리던 초록빛 여명처럼 으스럼한 등불. 어둑한 가을날이면 나는 이 마른풀 더미 지대를 오르락내리락 서성이며 묵은 향내 속에서 지나간 여름의 영혼을 찾고 있었다.
새하얀 달팽이의 자취와 나비의 날개 문의와 수줍은 토끼의 무리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먼지와 발효로 한층 탁해진 공기가 지붕 밑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고, 이제는 힘없이 축 늘어져 서 있는 초목의 온기가 육감적인 입김처럼 살갗을 스쳤다. 마른풀 줄기를 잇새에 물고, 떨어진 거미줄을 흰 깃발처럼 초록빛 웃도리에 걸친 채 나는 사다리에서 사다리로 바닥에서 바닥으로 무릎을 펄썩 주저앉아 기며, 어느 때는 건초 웅덩이 속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낯선 고양이를 쫓아가면서 비트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농부의 아내는 광에서 암탉이 낳아 놓은 달걀을 찾는다는 것을, 총각은 위쪽에서 다진 바닥으로 건초를 내리느라 갈퀴질을 하고 있는 싱싱한 처녀를 찾아서 못살게 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 중 어느 것도 찾고 있지 않았었다. 다만 꿈과 공상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내 머리 속에서 알 수 없는 아지랭이가 일더니 꿈과 공상의 불을 붙였고, 수수께끼처럼 아롱아롱하는 언어를 내게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이 언어에 괴퍅스런 자부심과 리듬을 붙여가며 끝없이 독백을 이어 갔던 것이다.
미처 벌초하기 전, 아직 풀들이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꽃망울을 숙이고 서 있는 동안 메뚜기 무리의 윙윙대는 울음 소리야말로 웅장한 것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물결의 멜로디요, 끝을 모르고 드르륵쩔그럭 톱을 켜는 소리였다. 거기에 간간이 끼어드는 귀뚜라미 울음, 그것은 땅 구멍에서 솟아나오는 바이올린의 진동이었다. 그 위에서 풀을 베는 긴 낫이 내는 단조로운 노랫소리.
건초를 수확하는 동안에는 드르륵드르륵 바위에 낫을 가는 소리가 들린다. 또는 날을 가는 망치 소리 - 잠을 깨워주는 아침의 망치 소리와 은은히 스러져 가는 저녁의 그 소리. 나무 갈퀴 밑에서 미처 덜 마른 풀이 내는 바삭거림. 찌는 듯한 무더위가 서쪽에서 뇌우가 쏟아질 것을 경고해 준다. 높이 적재한 마차의 삐걱거림. 진한 땀방울 냄새 - 그것은 넓게 챙 달린 밀짚모자 밑에서 늙은 농부의 주름진 얼굴 위로 투명하게 방울져 굴러내리더니 먼지 속으로 슬그머니 날아가 버렸다.
건초의 향내 속에서, 이미 죽음에 의해 베어지고 망각의 세계에 묻혀버린 그 옛날의 풀을 베던 무리들이 아물아물 부동(浮動)해 온다. 온통 햇볕에 그을러 거무튀튀한 얼굴의 기다란 사슬. 교회의 축성일이면 클라리넷을 불었던 그들. 나무 껍질의 담배통에서 흙 묻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냄새 맡는 담배를 집어올리던 그들.
콧마루를 벌름거리며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마른풀의 아물거리는 향내를 함뿍 들이마실 때면, 그들 모두의 모습이 내 가슴 속에서 되살아 움직인다. 또한 젖은 수건을 휘감은 포도주 항아리랑, 더위로 인해 기름이 번질번질 배어 나온 훈제한 고기를 바구니에 담아 들고 어느 버드나무의 엷은 그늘 밑에 내려놓던 마을 처녀와 아낙네들까지도.
그들은 갓 베어낸 건초의 행렬을 갈퀴로 뒤집으며, 땅바닥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눅눅한 풀들을 햇볕에 널어 놓았었다. 이렇듯 소용돌이치며 풍기는 진한 향내는 육감적이며 자극적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뜬 가슴은 황혼을 지나 한밤중이 되도록 가라앉지를 않아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맨발의 발걸음을 충동질했던 것이다.
하지만 건초의 향기 속에 스며 있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여독(旅毒)에 못 이긴 지나가는 나그네들까지도 반쯤 그늘진 두둑에 다리를 뻗고 누웠었다. 그 곳의 버림받은 웅덩이 속에서는 귀뚜라미가 다른 세계의 귀뚜라미를 향해 불붙는 사랑의 고백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그네의 갈색 눈과 처녀의 푸른 눈 사이에 시선이 오고갔다.
마치 그 때 먼지투성이로 써늘한 두둑에 드러누워 마른풀을 뒤집고 있는 맨발의 여인네들을 바라보던 내 모습처럼. 마른풀의 향내는 어떠한 화학적인 대충물로도 몰아내질 수가 없으리라. 사랑의 시선이 어떠한 새로운 종교로도 대치될 수 없듯이.
화사한 여름날 동안 프랑컨의 잘레 강, 묵묵한 사랑이 흐르고 있는 소박한 농촌의 강의 양쪽 연변으로는 위로 거슬러 올라가나 아래로 내려오나, 거대한 건초의 더미들이 헤아릴 수 없는 침침한 무리를 지어 등을 돌리고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흐름을 정지한 듯한 고요한 수면 위로는 솟고 잠기면서 밤의 무도회를 열고 있는 하얀 각다귀 떼를 쫓아 제비들이 여전히 철썩철썩 물을 차고 있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층층으로 쌓아올린 풀더미에는 아직도 낮의 태양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강물은 느릿느릿 들릴 듯 말 듯 소근대고 있었고 보랏빛 과일처럼 숲 위로는 달이 떠올랐다. 게다가 육중한 성이 자리잡은 포도원의 언덕은 물빛 음영의 장막 속에 들어서서 강물의 신선함을 마시고 있었다. 사랑을 하는데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 그 곳의 별하늘 밑에서 그대들은 내게 수줍은 키쓰를, 시든 장미꽃이 꽂힌, 푸른 꽃무늬의 옷 속에 감추어진 그대들의 젊고 발랄한 육체를 선사했었다.
그 때의 입맞춤은 가장 아름다운 입맞춤이었다. 그 이상 아름다운 입맞춤은 영원히 없었다. 그대들도 아직 이따금 그 시절을 회상하는가? 건초를 거두어들이는 향내가 해지는 골목으로 불어올 때면 나는 눈앞에 보듯이 고향을 생각한다 - 고향은 지금도 그 시절과 변한 것이 없으리라.
열려진 창으로 흘러 들어와 자란(紫蘭)의 방향(芳香)과 어우러드는 밤의 건초의 향기여, 알 수 없는 향료여, 너는 얼마나 많은 수천 수만의 꽃봉오리가 발효하여 이루어진 것이냐? 그 중에는 햇볕에 익은 꿀방울을 빨기 위해 벌들이 찾아드는 하얀 클로버 꽃이 있었다. 또한 아직 아침 햇볕을 받아 이슬 방울이 보랏빛으로 반짝일 때, 목동들이 가지째로 곧잘 꺾어 가는 가새풀의 별 모양 연분홍 꽃이 있었다.
어찌 그뿐이랴, 이 향기 속에는 야생 원두류와 황금 클로버, 마디풀과 조팝나물, 그리고도 수많은 사랑스러운 꽃망울들, 수호신과 요정을 위한 부산물의 향기가 서리어 부동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 풍기는 건초의 향기는 촉촉한 습기가 있다. 그 습기는 늪지대로부터 넓게 퍼진 부연 안개 속으로 발산한 이슬에서 연유한다. 수줍은 작은 짐승들이 숱하게 이 습한 향내 속을 휙 스치며 달려가 버렸다. 이제 이 향기는 한층 격렬하고 짙게 퍼지리라.
잘레 강 저편 산등성이 위로는 밤의 뇌우(雷雨)가 몰려와서 잔잔한 아지랭이 위로 굵은 물방울을 몇 방울 뿌리고 있는 것이다. 오오, 밤의 향기여, 수많은 감미로움의 씨앗이여! 그리고 인간이여, 그대는 잠들어 있는가? 깨어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취해 보라! 처녀의 덧창을 두드리는 목신(牧神)처럼 맨발로 걸어 보라!
안톤 슈낙(1892~1973). 낭만과 서정성을 지닌 표현주의 작가이자 시인. 특히 그의 수필은 리듬이 있는 화려한 문체에 어린 시절 고향을 중심으로 한 소재들을 회상하며 가시적인 장면 묘사에만 그치지를 않고, 향기와 음향, 감촉에 이르기까지 전 감각을 동원하여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내어 그것을 환상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인생을 바라다보는 슈낙의 달관된 시선이 읽는 이에게 더욱 공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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