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의 3월 세시풍속

如岡園 2010. 3. 28. 20:47

          # 三月

 서울의 꽃과 버들은 3월에 성하다. 남산의 잠두(蠶頭)와 북악산의 필운대(弼雲臺)와 세심대(洗心臺; 인왕산 아래 있던 누대 이름)는 유람객의 집합소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안개같이 꾀어 한 달 동안 줄어들지를 않았다.

 세심대는 선희궁(宣禧宮;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暎嬪李氏가 거처하던 궁) 뒤 산기슭이다. 신해년(1791) 모춘(暮春)에 정조께서 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사당 궁호)과 선희궁을 배알하시고 보여(步輿; 수레의 일종)를 타고 이 세심대로 올라가 기로(耆老)와 조신들을 거느리시고 활도 쏘시고 시도 지으셨다. 이 해부터 이런 행사가 습관이 되었다.

 이는 위의 두 궁과 영조의 옛집이 모두 이 산 아래에 있었으므로 성상(聖上)의 뜻이 이 근방을 마치 풍패(豊沛; 한나라 고조인 유방의 고향)나 남양(南陽; 후한 광무제의 고향)과 같이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근방에 사는 남녀노소가 모두 왕의 행차를 보기 위하여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곤 하였다. 이는 아득히 영대(靈臺; 주문왕이 만든 누대)와 반수(泮水; 周公이 여러 선비들을 회견하던 곳)의 유풍(遺風)과 같다.

 을묘년(1795) 봄에는 또한 이 세심대 아래 거주하는 조신(朝臣)과 유생 등을 불러다가 갱가(임금이 부르신 시가에 화답하는 노래)를 올리게 하고, 내각에 명하여 신해년(1791)이후의 것을 모아 상 하 2편 한 질의 인쇄물을 만들어 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때 모였던 선비들에게도 각각 나누어 주었다.

 정조께서 친히 지은 시에, "두 산은 참으로 한 집이요 모든 나무도 같은 동산을 이루었다 (兩

山眞一戶 千樹亦同園)" 고 했다.

 이 싯귀가 일시에 전송(傳誦)되니 태평시의 성사(盛事)로 여겨진다.

 정조께서 송나라 때의 옛 일을 모방하사, 3월에 내각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후원에서 꽃을 구경하고 낚시질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또 계축년(1793) 봄에는 난정(蘭亭; 중국 동진 목종 영화 9년 서기 353년 계축 3월 3일에 왕희지, 손작, 사안  등 41명이 모여 목욕을 하며 재액을 떨어버리는 修계를 하던 정자 이름)의 그 해 곧 계축년으로써 곡수유상지회(曲水流觴之會; 난정에서 수계할 때 굽은 물굽이에 잔을 흘려보내어 잔이 멈춘 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 잔으로 술을 떠서 마시던 모임)를 만들고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그 자제들까지 모두 모이게 했다. 그리하여 승지와 사관까지 합쳐 39명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정조께서 승하하신 지 5년 후인 갑자년(1804)에 내가('열양세시기'의 저자 김매순) 내각의 직책에 채워지게 되어 봉모당(奉謨堂; 이조 역대왕의 御製, 御筆, 璿源譜牒 등의 서적을 비치하기 위하여 정조가 세운 창덕궁 안에 있는 堂의 이름)에 숙배(肅拜)하고 그대로 봄철의 대봉심(大奉審; 왕명을 받들어 봄철에 능이나 묘를 대대적으로 보살피는 일)을 행했다. 그리고 나서 개유와(皆有窩; 창덕궁 부용정 남쪽에 있는 도서비치소. 중국서적을 비장했었음)에 있는 사부서(四部書; 經 史 子 集 등 중국 서적의 네 분류)를 햇볕에 쬐어 말렸다. 그 때 후원의 온갖 꽃은 만발했었다. 안내자인 늙은 아전이 지나치는 연못 누대 정자 등을 가리키면서 "이것들이 모두 선왕[正朝]께서 각신(閣臣)들에게 잔치를 베푸시던 곳이라" 한다. 이 말을 듣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니 주렴과 휘장 안에 앉아 계신 듯한 감회가 들었다.

 

          # 한식(寒食)

 내병조(內兵曹)에서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불씨를 궁전 안에 있는 모든 관청과 대신들 집에 나누어 준다. <周禮> 하관(夏官) 사관장(司관章)에 보면 사관[官名]이 불을 사용하는 정령(政令)을 맡았다고 한다.

 

          # 삼일(三日:삼짇날)

 우리 나라 풍속에 기제사(忌祭祀: 死亡日 祭祀)는 중히 여기어도 시제(時祭: 時享)는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오랑캐의 더러운 풍습이다. 그러나 이조 중엽에 이르러 유현(儒賢)들이 배출하고 사대부 중에서도 예절 따지기를 좋아하는 자가 많아져 비로소 시제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체로 가난하여 네 계절에 모두 시제를 지내는 이는 드물고, 대개가 봄의 삼짇날과 가을의 중양절(重陽節: 9월9일)에만 지내는 사람이 많다.

 

          # 곡우(穀雨)

 강물고기 중 아름다운 것에 공지(貢指; 공미리)라는 생선이 있다. 큰 것은 한 자나 된다. 비늘이 잘고 살이 많이 쪄서 회로 만들어도 좋고 국을 끓여도 좋다. 그것이 매년 3월초 한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올라가 미음(渼陰;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 미음리)까지 가서야 멈춘다. 그런 현상은 곡우 전후 삼짇날을 전후하여 가장 성하다. 이 때가 지나면 없어진다.

 그런데 강가에 사는 사람은 이것으로써 철의 이르고 늦음을 점친다. 농암 김창협의 시에, "물고기가 곡우철을 맞이하느라고 비늘을 번쩍이며 올라가누나" (農巖集 권 5 '次季愚韻'이란 시의 1귀를 인용했다. 원문은 "還山無日不閒行 白石淸泉到處明 野友詩筒非俗事 隣僧菜把見人情 魚迎穀雨鱗鱗上 鳥醉花晨滑滑鳴 頗怪陶潛稱達道 却將時物感吾生".)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공지(貢指; 공치의 訛音)라는 말은 곡지(穀至)라는 말이 잘못 소리난 것이요, '곡지'라는 것은 곡우가 왔다는 뜻이라 한다.

                                                                   <洌陽歲時記>에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열양세시기는 열양(洌陽 ; 漢陽-서울)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으로, 저자는 정조 때의 학자 김매순(金邁淳)이다. 그는 문장과 덕행으로 세인의 아낌을 받았는데 특히 문장은 뛰어나 여한십가(麗韓十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문집으로 <臺山集>20권이 있다. 이 <열양세시기> 한 권은 그의 문집에 들어 있지 않고 따로 사본(寫本)으로 전하여 왔었다. 이 책 맨 끝에 저자가 발문(跋文)을 썼는데 그 날짜로 보아 1819년(순조 19) 유두일(流頭日)에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완성은 <동국세시기>보다 30년이나 앞서 된 책이다. 주로 서울의 풍속을 기술하고 있는데, 연원(淵源)을 중국 풍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동국세시기와 같다. 그러나 내용이 좀 간략한 편이다. 1911년 광문회에서 <동국세시기>, <京都雜志>와 합본하여 활자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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