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가을에 우리들의 시지<금성>이 드디어 발간되었다. 나와 유군[柳葉]의 발의였고, 간비(刊費)는 둘의 임의, 수시의 출자로 충당하였다. <금성>이란 제호는 내가 붙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 '黎明'을 상징하는 '샛별'의 뜻과 사랑의 여신 'Venus' 두 가지 뜻에 의함이었겠다. 동인으론 유, 백[白基萬] 두 군 외에 서울에 있는 고 이장희군이 뒤에 가입하였다.
<금성> 발간의 일로 나는 일부러 귀국하여 그 첫호를 내기에 골몰하였고, 예과 3년을 졸업한 뒤에도, 마침 동경 대진재 때문도 있었지만, 나는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이 '시문학 운동'에 열중하였다. 딴은 나뿐인가. 엽군은 문학을 한다, '연애-실연'을 한다 하는 통에 예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한때 해인사, 유점사 어디 어디로 입산 수도 뒤에 가사 장삼에 송낙 바랑으로 서울의 거리를 헤매었으며, 웅(백기만의 호)군은 가정 사정인지 그의 야성적 방랑벽의 소치였는지 예과 2년 때에 진작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만이 2년간을 신문학운동에 바치고 나서 1925년 다시 도일하여 그때는 이미 J군의 고구마 회식 때의 맹약이 못 미더웠음인지 불문과에서 다시 영문과로 전과하여 학업을 꾸준히 계속하게 되었으니, 유, 백 두 군보다도 덜 천재벽을 가진 속된 나의 다행한 결과라 할까.
우리들의 당시 시풍이 자칭 상징주의요 퇴폐적임은 누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세 사람- 뒤에 고월(古月, 이장희)까지를 합한 네 사람의 시풍은 결코 정말 세기말적 데카당적은 아니었고, 차라리 모두 이상주의적 낭만적 감상적인 작품이었다. 금성 창간호에 나는 그 창간 서사로서 '기몽(記夢)'이란 한 편과 '꿈노래', '영원한 비밀' 등을 실었고, 엽군은 '낙엽'이란 센치한 단장(斷章)을, 웅군은 '북극의 곰', '은행나무 그늘에서' 등 혹은 야성적인 혹은 아늑한 감성을 노래한 작품을 실었다. 역시로는 나의 '근대 프랑스 시초'(보들레르, 베를렌) 및 나와 백군의 '타고르 시초' 등이 연재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지 <금성> 발간의 모티브와 작풍은 아무래도 그 첫호 권두에 실렸던 졸작 '서사' 한 편이 그것을 적절히 대변한 듯하다. (표지의 그림은 安夕影의 筆로 여신 비너스의 나상이었고, 발행은 일본인. 당국의 원고 검열이 성가셔 유군이 아는 일본인 某의 이름을 빌렸었다.)
서사 '기몽'은 다음과 같은 시였다.
記夢
- <금성>지 발간 서사 -
시커먼 메를 넘고 넘고, 진흙빛 물을 건느고 또 건너
임과 나와 단 둘이 이름 모를 나라에 다다르니
눈앞에 끝없이 깔린 황사장(黃沙場) -
석양은 아득하게도 지평선을 넘도다
난데없는 일진 음풍이 흑포장(黑布帳)을 휘날리고
주린 가마귀 어지러이 떼울음 울자
모래 위에 산같이 쌓인 촉루들은
일시에 일어나 춤추고 노래하며 통곡하도다
달이 서산에 기울어 만뢰는 다시 잠들고
동편 하늘에 오직 별 하나 -
영원의 신비로운 눈을 깜박일 때에
나는 임과 함께 상아의 높은 탑 위에 올라가도다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 크나큰 꽃 한 송이 떠올라
다섯 낱 붉은 잎이 장엄히 물 위에 벌어지며
새벽 안개 속에 깊이 감추인 대지로서
풍편에 종소리 한두 번 들려오도다
창간호가 나오자 당시 우리 것보다 1년 전에 간행된 문예지 <백조>와 함께 갑자기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인기도 좋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때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모두 자가도취로 자칭 천재, 주사(酒肆라야 선술집이지만), 대로를 자못 제노란 듯이 횡행 활보하였다. - 나는 예의 루바슈카, 보헤미안 넥타이로.
이윽고 창간호 소재 제작에 대하여 안서 김억의 시평이 <개벽>지엔가 실렸는데, 전인(前引) '기몽' 중의 '황사장'이란 한마디와 타고르 역시 중의 오역 여부로써 나와 안서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편 나의 번역인 '보들레르 시초'를 보고 고(故) 산강재 변영만(山康齋 卞榮晩) 선생이 그 역자인 나를 그리워하여 나를 여러 번 나의 숙소로 위방(委訪)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한다. 빙허(憑虛), 상화(相和) 등 제씨와 서로 알게 된 것도 아마 그즈음이다. 동인 제군들은 당시 유군의 숙소이던 영등포까지 밤마다 한강을 건너 달려가서 제2호에 실린 <금성 노래> - "Morning Star, word and music by C. Rhew" 라 부제(副題)한 유군 작사 작곡의 명곡을 광야에서 밤 깊도록 합창하다가 들어가 다시 통음하면서 문학적 종횡 담론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르던 것을 지금도 역력히 기억한다.
2호는 내가 마침 다시 도일했기 때문에 유군이 발간했는데, 엄청나게 고급 용지를 쓴 호화판이었으나 유군의 당치않은 통속 서사시(?) 한 편과 정교(鄭喬)인가 하는 노인의 '서상기 해주(西廂記 解註)'가 이색편이었다. 3호는 다시 내가 편간, 동인으로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 군의 기고인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란 수작 한 편을 아마 유군의 주장에 의하여 추천작으로 실었다. 파인은 나와 중학에서 동기 동창이었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을 하여 진작 <장미촌>엔가에 그 작품이 실렸었고 기타 학생 잡지에도 종종 시작을 발표한 시단의 약간 선배로서 워낙 <금성>지의 추천 시인은 아닐 터인데 미안한 일이었다.
<금성> 3호를 내는 동안 나도 늦게나마 다소 연애를 했던가 보다. 창간호의 첫 상징시를 바쳤던 S는 시참(詩讖) 그대로 '영원한 비밀'을 남긴 채 나의 연래의 가슴 속 뜨거운 사랑을 모른 채 가버렸고, 뒤에 고향 C읍에서 문학소녀 K를 만나 그녀를 사랑하여 드디어 그녀를 대동하고 청진동 72번지 금성사에 와서 기거를 같이 하였다.(그 개천가 이웃집에는 팔봉 김기진이 그의 애인과 같이 살았었는데 그들의 피아노 소리만 간간 지나다 들었을 뿐 면교는 없었다) K는 참으로 재주있는 소박한 소녀로서 나에게서 시와 근대사상 16강 기타를 배웠고, 그녀의 시 '책 한 권'이란 한 편을 강가마(姜珂瑪, 그녀의 아명)란 이름으로 '독자시' 란에 실어주었으나 어찌어찌하여 두어 해 만에 갈리고 말았다.(이제 새삼 익명을 해 무엇하리.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된 것을! 뒤에 바로 여류 소설가로 단편 '소금', 장편 '인간문제' 등을 발표하여 영명을 날린 姜敬愛 여사...) 뒤에 좀더 자세히 언급할 장(학창기,'春宵抄')이 있겠기에 지금은 마지막 시만 -
별후(別後)
발자옥을 봅니다
발자옥을 봅니다
모래위에 또렷한
발자옥을 봅니다
어느날 벗님이 밟고간 자옥
못뵈올 벗님이 밟고간 자옥
혹시나 벗님은 이 발자옥을
다시금 밟으며 돌아오려나
임이야 이길로 올리 없건만
임이야 정녕코 돌아 온단들
바람이 물결이 모래를 쓸어
옛날의 자옥을 어이 찾으리
발자옥을 봅니다
발자옥을 봅니다
바닷가에 조그만
발자옥을 봅니다
(1924. 9)
<금성> 제3호를 낸 뒤 나는 이리하여 다시 표연히 도일. 남은 정신을 수습하여 영문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유군은 그 실연 때문에 중이 되고, 백군은 생활에 쪼들려 낙향하고, 고월만이 혼자 외로이 서울을 지키다가 신경쇠약에 걸려 뒤에 아깝게도 자재(自裁)하고 말고...... 이리하여 <금성>의 동인들 - 아니, 누구보다도 K소녀와 갈린 뒤의 나의 정황은 그야말로 마치 묘옥(妙玉)이 업혀간 뒤의 홍루몽 정경과 같이 소슬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현계필멸(顯界必滅)'...... 그간 우리들의 시흥(詩興)도 다하여서 <금성>은 단 3호로써 쓸쓸한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양주동. <文酒半生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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