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인생에 대하여

如岡園 2010. 12. 22. 17:31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러라. '나는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은혜를 고마와할 줄 모르는 사람, 건방진 사람이나 사기꾼, 샘이 많은 사람이나 무뚝뚝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그런 결점이 있는 것은 그들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성은 아름답고 악의 본성은 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쁜 짓을 하는 자의 본성도 나와 같은 근원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성(理性)과 같은 신성(神性)을 갖고 있으므로 나와 동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나를 추악한 일에 끌어들일 수 없고, 또한 나도 동포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협력하도록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양발이나 양손이나 두 눈까풀, 아랫니와 윗니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서로 배척하는 것은 자연에 위배되는 일이다. 그리고 남에게 화를 내거나 남을 미워하는 것은 곧 서로 배척하는 것이 된다.

 

 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들을 지체해 왔으며 또 얼마나 자주 신들로부터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는가를 상기해 보라. 당신 자신도 그 일부분인 우주가 무엇이며, 당신은 그 우주의 어떤 지배자의 방사물(放射物)인가를 이제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허용된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을 당신의 마음에 빛을 받아들이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흘러가고 당신도 사라져버려 기회가 다시는 당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그렇다면 좀더 새롭고 좋은 다른 일을 배울 시간을 갖고, 공연히 우왕좌왕하지 말라.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다른 잘못도 피해야 한다. 활동이 지나쳐 삶에 지치고, 모든 충동과 사고에 있어서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역시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지켜 보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은 모든 사물을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어떤 시인(핀다로스, 플라톤에 의해 인용됨)의 말처럼 "지하의 일을 기웃거리고", 자기 속에 있는 다이몬(daimon,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神性. 보통 理性을 가리킨다.)을 충실히 섬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마음 속이나 들여다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이몬을 섬긴다는 것은 정념이나 무분별 그리고 신과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한 불평 불만을 삼가고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신이 하는 일은 그 탁월성 때문에 우러러 받들 수 있고, 인간이 하는 일은 그가 우리의 동포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며, 또 때로는 그들이 선과 악에 대해 무지-이것은 흑백을 분별하는 능력을 빼앗긴 것 못지 않은 결함이다-하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서는  측은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3천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아니 3만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 살고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잃고 있거나, 또 지금 잃어가고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래 산 삶도 짧게 산 삶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현재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으며 '따라서 우리가 잃는 것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리는 시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만물은 아득한 옛날부터 같은 형태를 갖고 같은 주기를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동일한 사물을 백년 동안 또는 2백년 동안, 아니 영원히 본다 하더라도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가장 오래 사는 자든, 가장 짧게 사는 자든 잃는 것은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갖고 있는 것은 현재뿐이요, 어느 누구도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 인간이 잃는 것은 현재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견유학파(犬儒學派, Kynik學派, 기성의 권위와 가치를 멸시하여 세상을 냉소적인 눈으로 보는 학파)의 모니모스(디오게네스의 제자. 그의 '말'이란 '만물은 공허하다'는 것으로, 시인 메난드로스의 작품에서 인용되고 있다)가 한 말은 사실이다. 이 말이 진실한 이상 사람들이 이 말의 유익한 점을 받아들인다면, 이 말이 유용하다는 것도 명백한 일이다.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가장 해치는 것은 첫째로는 그것이 하나의 부스럼, 이를테면 우주의 종기(腫氣)가 되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삼라만상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어떤 일[재앙]이 일어나더라도 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이탈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거나 또는 성난 사람처럼 상대방에게 손상을 입히기 위해 덤벼드는 경우다. 세째로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은 쾌락이나 고통에 압도되었을 경우고, 네째로는 가면을 쓰고 거짓으로 불성실하게 행동하거나 말했을 경우며, 다섯째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목적과 관련시켜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행동이나 충동을 어떤 일정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무분별하게 힘을 기울였을 경우다.

 그렇다면 이성적 동물[인간]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가장 존중해야 할 도시와 국가(여기서 국가는 우주를 가리킴)의 이법과 법률에 따르는 것이다.

 

 인생은 찰나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실체는 끊임없이 유동하며, 감각은 둔하고 육체는 부패하기 쉬우며, 영혼은 소용돌이치고 운명은 헤아릴 길이 없으며, 명성은 불확실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체에 속하는 모든 것은 꿈이나 연기와 같다.

 인생은 전쟁이고 나그네의 행로며 죽은 후의 명성은 망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철학은 곧 다이몬을 지키고 손상되지 않게 하며 또한 쾌락과 고통을 초월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무슨 일이든 목적 없이 행하지 않고 거짓이나 위선을 멀리하며,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개의치 않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자기 자신이 유래된 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며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은 각 생물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가 분해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개개의 사물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 이들 원소 자체에게 조금도 두려운 일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가 만물의 변화와 해체를 두려워하겠는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일에는 악이 있을 수 없다.

 

 (이 글은 카르눈툼에서 쓴 것임. 카르눈툼은 다뉴브 강의 오른쪽 기슭에 있는 판노유아의 도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70년~174년 원정 길에 나섰을 때 몇번이나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오늘의 헝가리 하임불크에 해당함. 명상록의 부제 '인생에 대하여'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장르별로 제목을 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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