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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랭 싸인/모나 리자의 미소/오줌싸개 소년상/더 밝은 빛을

如岡園 2011. 1. 2. 16:20

          # 올드 랭 싸인

 우리나라에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탄생하기 전 애국가의 곡으로서 널리 불리어졌고, 영화 '哀愁(Waterloo Bridge)'의 주제곡으로 잘 알려진 이 노래의 원형은 스콧트랜드의 대표적 민중시인 로버트 번즈(1759~1896)가 자기의 영감을 넣어서 부활시킨 스콧트랜드의 민요이다.

 번즈는 스콧트랜드 서남부 에이셔의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머슴들과 같이 심한 노동에 종사했다. 그것은 '은자처럼 즐거움이 없고 또 가리선(船)을 노젓는 노예처럼 숨쉴 틈도 없는' 생활이었다. 과중한 노동은 소년의 육체와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늙지도 않았는데 허리가 구부러지고 때때로 두통과 우울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우한 환경 밑에서도 시인으로서의 그의 특이한 재능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시집은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거기에는 스콧트랜드의 아름다운 풍물이 소박하고도 깊은 감동으로 읊어져 있었다.

 그의 시는 소위 독서계급에서만이 읽혀진 것이 아니었다. 농부도 식모도 노동자도 그들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그의 시집을 샀다.

 그는 명성을 크게 얻었으나 생활은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가난이 끝까지 그를 따라다녔으나 그의 스콧트랜드의 자연과 민중에 대한 애정은 최후까지 변하지 않았다. '올 드랭 싸인'도 그러한 노래 중의 하나이다. 제목의 뜻은 'Old Long Since(그 먼 옛날)'이란 뜻으로, 가사의 내용은 어릴 적 친구들과 산야를 뛰어다니던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른 곡으로 불리었으나 나중에 그 내용과 꼭 맞은 현재의 곡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전세계의 모든 문명국에서 <이별의 곡>으로서 수없이 애창되고 있다.

 이 노래는 이국인인 우리에게조차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니만큼 향토애가 두터운 스콧트랜드인들이 즐겨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 곳에서는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모임이 끝나 헤어질 때는 '올드 랭 싸인'을 부르게 되어 있다. 그 때 모든 사람은 왼손을 오른 쪽으로 오른손을 왼쪽으로 내놓고 테이블을 중심으로 서로손을 잡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가사의 마지막에 '자 우리 친구여, 여기에 내 손이 있다. 자네 손을 나에게 다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 모나 리자의 미소

 모나 리자를 그린 레오날드 다 빈치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르네쌍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그림은 그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셀 죠콘드의 의뢰를 받아서 그의 아내 에리자벳타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모나 리자'라는 말은 '나의 에리자베스'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인 뽀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에리자벳타는 피렌체에 사는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랄르디니의 딸이며,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503년에서 4년 동안 그녀가 24~27세 때였다. 판자에 유화로 그려졌고 화면의 크기는 세로 77센티 가로 55센티인데, 이러한 소품이 4년이란 세월을 소비해서 그려지고, 아직 미완성이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서 모델에게 동일한 표정을 잡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다 빈치는 이 문제를 다소라도 해결할려고 아뜨리에 악사, 광대들을 불러들여 에리자벳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입언저리를 약간 긴장시킨 것 같은 그 특이한 미소는 희랍과 동양의 고대조각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것이 있다. 왜 이러한 미소가 나타났느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에리자벳타는 당시 어린 자식을 잃은 직후였기 때문에 그 슬픔이 저절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소의 원인을 화가 자신에게 돌리고 그의 인간 관찰의 깊이가 이 복잡한 표정을 가져오게 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다 빈치는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의 초대를 받았을 때 이 그림을 가지고 갔는데 왕은 이것을 4천 에큐로 사서 폰텐느블로 성에 걸어 두었다. 그후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서 보관되어 오다가 지금은 루불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여러번 세정(洗淨)을 받고 광택니스가 칠하여졌기 때문에 화면 전체에 가는 금이 가고 세부(細部)는 씻기어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모나 리자의 미소>는 그때문에 그 심오한 기분을 더욱 돋아주고 있어 인간과 예술에 관한 수수께끼를 물어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 오줌싸개 소년상

 벨지움의 서울 브룻셀의 중심에 있는 그랑 플랑스(大廣場)에서 조금 더 가면 4, 5세의 귀여운 사내아이의 동상이 서 있다. 이 아이는 발가벗은 모습이며 유명한 여행 안내자 베데카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자연스럽게' 오줌을 싸고 있다.

 이것이 그 천진난만한 포오즈로 전 세계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오줌 싸는 少年像>의 원형(原型)인 것이다.

 이 동상이 17세기 전반에 벨지움의 조각가 듀케노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그것이 만들어지고 더우기 시의 중심에 세워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그러나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에 걸쳐서 홀랜드 벨지움을 포함하는 네델란드 일대가 당시의 강국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던 무렵의 에피소드에 기인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일설에 의하면 이 소년은 현재 동상이 서 있는 근처의 건물 2층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창가에 서서 오줌을 누었는데 마침 그 바로 밑에 있었던 스페인의 보초가 오줌벼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억압자에 대한 반항심이 왕성하였던 시대였으니만큼 이 소년의 이러한 행동이 영웅적 행위로 인정되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동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더 극적인 이야기도 있다. 스페인군의 공격으로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어 갈 때, 이 소년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적과 우군 사이로 어정어정 걸어나와서 타오르는 불길을 향하여 오줌을 누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들은 모두 저항운동의 역사적 기념비로서 이 동상을 본 것이며, 그것과 관련이 없는 유래설도 있다. 

 어느 시의원의 어린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면팔방으로 그 아들의 행방을 찾는 한편 아들을 찾게 되면 발견된 순간의 포오즈로 동상을 만들어 시에 기부하겠다고 맹세했다. 아들은 무사히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때의 포오즈가 현재 동상과 같은 포오즈였다는 것이다.

 이 동상에는 후일담도 많다. 18세기 중엽,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데레사의 즉위와 이에 대한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간섭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소위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유럽 전토에 파급하여 각국이 서로 엇갈려 싸움을 하게 되었다. 

 영국과 홀랜드 사이에도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중 가장 큰 전투는 벨지움의 폰트노아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영국은 홀랜드를 격파하고 그 지방 일대를 약탈했는데 그때 <오줌 싸는 소년상>도 같이 약탈을 당했다. 그러나 그 동상이 바다를 건너가기 전에 이번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충돌하였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 프랑스군이 동상을 전리품으로서 본국으로 가져갔다. 다행히도 프랑스인은 유모어를 이해할 줄 알았다. 루이 15세는 브룻셀의 역사적 미술품이 부당하게 약탈 당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그것들을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돌려보낼 때 사죄의 뜻으로 호화스러운 옷까지 만들어 입혔던 것이다.

 이 우아한 사죄가 좋은 관습이 되어서 동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옷을 기증받았다. 특히 흥미있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일이다. 벨지움은 전쟁중 계속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연합군이 제2전선을 펴고 대반격을 하자 드디어 브룻셀도 해방이 되었다. 때마침 미국의 해군기념일이 가까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해방기념으로 조그마한 수병복(水兵服)을 만들어 동상에게 보냈다. 

 이렇게 하여 이 조그마한 동상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시민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여 왔던 것이다.

 

          # 더 밝은 빛을

 이것은 괴테가 임종 때 남긴 말로 알려져 있다. 괴테의 밝은 인생관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고, 괴테의 일생의 구도생활(求道生活)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참으로 괴테다운 말이다. 이 말의 출처는 1833년에 베를린에서 나타난 괴테의 담당의사 칼 포겔의 병상보고의 별책에 있다.

 "내가 그 임종의 방을 잠간 비운 사이에 말한 '더 좀 빛을!' 하는 말이 이 분의 최후의 말이었다고 한다. 이 분은 대단히 어두움을 싫어하는 분이었다."

 한편 1832년 6월의 <一般文學新聞>에는 괴테가 하인인 프리드리히에게 '서재의 두번째 창도 햇빛이 들어오게 열어 주게' 하고 말했다고 쓰여 있다.

 임멜만의 <회상록>에 의하면 괴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졌다고 쓰여 있다.

 믿을만한 출처에 의하면 괴테의 마지막 말은 그의 며느리에게 한 말로서 "이리 온, 우리 아가, 나에게 악수를 해 다오." 였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