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황제(倭皇帝) 부럽지 않다
몸 편하고 우대 받고 호강하는 품을 설명하는데 일본 임금의 생활을 인용한 것이다.
<용재총화>에 보면 "일본국에 황제가 있고 국왕이 있으니 황제는 궁중에 깊이 파묻혀 하는 일이 없고 다만 아침저녁으로 하늘에 절하고 해에 절할 따름이어서 세상에서 권력이 없으면서 존귀한 자를 왜황제(일부 발음은 예황제)라 이른다." 하였으며 그의 정정(政情)을 여러가지로 설명하였다.
국왕이 오로지 국가의 정치를 주관하고 쟁송을 처단하였다. -저들의 말하는 장군(將軍)을 국왕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대신이 있어서 각각 병사를 가지고 지면을 나누어 웅거하여 때로 반란을 꾀하고 명령에 거역하나 왕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임짐왜란 전의 우리나라 지식인이 가진 일본에 대한 이해도를 짐작할만하다.
또, "전혀 노루, 사슴, 소, 돼지를 먹지 아니하며 다만 개(狗)먹기를 좋아하고 또 잉어를 즐겨먹어 이것을 '제일 아름다운 맛'이라고 하였다." 고 설명하였으니 당시의 풍습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신정승(申政丞) 구정승(具政丞)
조선 초기에 살인여마(殺人如馬)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단종의 비극을 연출하여 대망의 왕위에 오른 세조가 득의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 남다른 공로가 있는 신숙조(申叔舟)와 구치관(具致寬)을 두고 이런 얘기가 있다.
신숙주는 영의정이요 구치관은 새로 우의정이 되어 정승 줄에 서게 되었는데 하루는 왕이 두 정승을 불러 놓고 좌석을 마련하여 한 잔 하는 것이다.
"내 이제 부를 것이니 대답을 하라. 구 정승!"
그래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그게 아니라 먼저부터 있던 정승인 신숙주를 부른 것이라고 벌주로 한 잔.
다음, "신 정승!" 하고 부르기에 이젠 자기를 부른 것이거니 하고 또 대답하였더니 그게 아니라 신숙주 신 정승 얘기라고 또 한 잔.
"구 정승!" 부르기에 둘 다 대답을 않았더니 어른이 부르는데 어째 대답을 않느냐고 둘 다 한 잔씩.
이것이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 종일 취토록 먹여서 보냈다고 한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변란을 겪은 뒤지만 군신간 화기 어린 정경이라 할만한 일이다.
용병(用兵)하는 술모(術謀)라
고려 말의 최영 장군은 호를 철성(鐵城)이라 하였다. 젊었을 때 그 아버지가 매양 경계하기를, "금을 보기를 흙과같이 하라(見金如土)하였으므로 이 네 글자를 큰 띠(紳)에 써서 종신토록 마음에 새겨 잊지 않았다.
어느 때나 그렇지만 당시의 재상들이 서로 맞이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고 다투어 맛난 음식을 장만하여 호사를 다투었는데 그만은 그렇지 않았다.
한낮이 지나도록 두었다가 다 저녁때서야 기장을 섞어 밥을 짓고 여러가지 나물로 찬수를 삼았다. 손들이 주렸던 판이라 다들 먹고 나서는
"철성댁 식사가 유난히 맛있다."고들 하면 그는 웃으며, "이것도 용병하는 술모니라."고 하였다 한다.
이 태조의 위화도 회군 뒤 형벌을 받아 죽을 제, "평생에 악한 일을 한 일이라고는 없건만 오직 임렴(林廉)을 죽인 것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내가 탐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풀이 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는데 성현(成俔)이 <용재총화>에 이것을 쓸 때까지도 무덤에 풀이 없어 홍분(紅墳)이라고 하였다는데 지금도 고양군 벽제면에 있는 그의 묘는 역시 홍분 그대로이다.
보은단(報恩緞)
홍순언(洪純彦)은 조선 중엽의 역관으로 공에 의해 당릉군(唐陵君)까지 봉한 분이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 남자의 호기로 기관(妓館)엘 들렸는데 매파의 말이 신기하다.
"귀한 댁 출신의 처녀가 있는데 하루 저녁 해우채가 자그만치 천량이요 하루 저녁 모신 뒤로는 일생을 받들겠다 합니다."
일종의 객기랄까 남자다운 성격의 그는 성큼 천금을 던지고 그 여성을 만났다. 그러나 너무나 정숙하고 나긋나긋하여 손 한 번 만지고 내력을 물으니 아버지를 고향으로 반장해 모실 비용이 없어 몸을 팔아 감당하겠노라는 끔찍한 얘기다. 효심에 감동되어 그냥 돌쳐서려니 여인은 울며 아버지로 모시겠노라고 하여 부녀로서의 인연을 맺고 헤어져 왔다.
그 뒤 홍순언은 공금 포탈로 옥에 갇혔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다시 사신을 따라 중국엘 들어갔는데 그의 딸이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후취부인으로 들어앉아 있지 않은가? 석성도 그를 장인으로 대하고 극진히 굴었다. 그리고 구원병 파견에 대하여도 남달리 주선하여 이여송의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성 부인은 재생의 은혜를 잊지 못해 '보은(報恩)' 두 자를 무늬로 넣어 손수 비단을 짜서 선물로 하였으며 이것은 조선 오백년에 가장 인정미 있는 얘깃거리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 홍순언이 서울 복판의 다방골에 살았고 그의 동네를 '보은단 미담'의 고장이라 하여 '보은단골' 또는 담을 곱게 꾸미고 살았다고 하여 '고운담골'이라고 하였다. 한 때 정객들의 사교장이던 '미장(美墻)그릴'은 이 '고운담골'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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