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양주밥 먹고 고양 구실 한다/악망위에 턱 걸었나/습지자도 불가무/불강불욕

如岡園 2011. 4. 20. 23:50

          # 양주(楊州) 밥 먹고 고양(高楊) 구실 한다.

 경기도 고양군은 서울시로 점점 편입되고 나머지는 지금은 일산 시역에 속해 있지만 본래 그 읍이 벽제관(碧蹄館) 안말이다. 본시 '벽제관'이라는 것은 그곳 객사(客舍)의 이름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여기서 승리를 거둔 때문에 왜정하에 그냥 지명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읍의 길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이 양주군(지금은 양주시)이다. 

 그러니까 관청에 구실 사는 사람 가운데는 양주 땅에 주소를 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 양주에 살면서 막상 일은 고양 땅의 일을 하고 있었으니 그래 이런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좋지 않게, 즉 이 회사에 적을 둔 사원이면서 이해가 상반되는 상대방 회사의 편의를 봐 준다든지 하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니까 한때 정가에서 흔히 썼던 '사꾸라'라는 말과 매우 비슷한 내용이다. '사꾸라'란 일본말로 말고기를 말하는 것으로 쇠고기보다 빛이 더 붉대서 하는 소리였다.

 질이 좋지 않은 고기 장사치들이 쇠고기 가운데 슬쩍슬쩍 말고기를 섞어 팔았기 때문에 본색을 숨기고 상대편 진영에 들어가 자기 편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당하는 측에서 보면 양주밥 먹고 고양구실하는 놈 때문에 피해를 입는 셈인 것이다.

 

          # 악망위(惡亡尉)에 턱 걸었나?

  조선조 초기 태종의 부마에 평양군 조대림(趙大臨)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둘째 따님 정경공주의 남편이다.

 장인되는 임금의 배경을 믿고 어찌나 횡포한 일이 많았든지 세상에서 악망위(惡亡尉)라 별명지어 불렀다.

 그래 무서운데 없이 굴든지 하면,

 "저놈이 악망위에 턱을 걸었나?"

 하는 것이 일상용어에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당시의 법으로, 사헌부 관원이 하인에게 먹통을 들려 가지고 다니다가 백성의 원성이 높은 집은 대문에다 먹칠을 하여 외부와 왕래를 못하게 하고 법으로 다스리는 제도가 있었다. 

 유명한 맹사성(孟思誠)이 헌관으로 있을 때 이 집에 먹칠을 하고 조대림을 잡아다 단단히 신문을 하였다.

 태종이 노하여,

 "어느 놈이 내 말도 안 듣고 내 사위에게다 손을 대느냐?"고 잡아 죽이려고 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그만 둔 적도 있었다.

 조대림의 부인 되는 이가 작은 공주요, 그의 살던 동네를 소공주동(小公主洞)이라 하였는데, 오늘의 소공동의 이름은 거기에서 생긴 것이다. 뒤에 그의 집은 남별궁(南別宮)이 되어 외국 사신의 숙박소로 쓰이더니, 그 자리에 눌러 <조선호텔>이 들어 앉아 지금도 외국 귀빈의 숙소로 쓰이니 신기한 일이다.

 

          # 습지자(拾之者)도 불가무(不可無)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농성 중의 일이다.

 끝까지 버티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축의 뜻은 장하나 그만한 실력은 없고 그렇다고 화의(和議)를 받아 들이자니 전고에 없던 일이라 결정을 못내리는 중에 시일만 천연하여 이젠 무릎 꿇고 항복할 수 밖에 없는 극단의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래 항서(降書)를 써 놓고 장차 청진(淸陣)에 가려 하는데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들어와 이것을 찢어 던지며 통곡하였다.

 본시 화의를 이끌어 오던 이조판서 최명길은

 "이미 적을 당할 순 없고 척화(斥和)하는 것을 청의(淸議)라 하겠지만 나는 혼자 더러운 이름을 받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이것을 차근차근 줏어 맞추었다. 그래 그 때의 사람들이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겠고(裂之者不可無) 줍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겠다(拾之者不可無)"라고 하였다 한다.

 화의가 성립되자 김상헌은 목을 베어 자결하려다 이루지 못하였고, 정온(鄭蘊)은 칼로 배를 갈랐다가 이루지 못하고 후에 삼학사와 함께 심양까지 끌려가 여러 해 고초를 겪은 뒤에서야 놓여 나왔다.

 함께 잡혀 갔었는데 진중에서의 꿋꿋한 태도를 보고 김상헌도 오해를 풀어 서로 화해하였다고 한다.

 

          # 불강불욕(不降不辱)

 담원 정인보(鄭寅普)는 동래 정씨 명문의 후예로 고종 30년(1893년)에 낳아 6.25사변 중 납북 당한 채 소식이 끊긴 분이다. 그가 왜정아래 처신의 구호로 삼은 것이 不降不辱이다. 불강기지 불욕기신(不降其志不辱其身, 그 뜻을 낮추지 말며 몸을 욕되이 하지 않는다)은 굳은 신념의 표시이다.

 조상의 이룩한 가풍과 타고난 천품으로 일찌기 학문의 기반을 이루었고 스물 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 동지들과 광복 운동을 하다가 가정 형편으로 중도에 귀국, 1923년 이래 연희전문학교를 위시하여 각 전문학교에서 국학과 동양사를 강의하며 시대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도 진력하였다.

 일제 말엽 어두운 시절을 용하게 겪고 해방을 맞아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는 서글픈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허허 책이 있어야지"

 지조를 지키어 그 뜻을 낮추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생명같이 여기는 서책을 모조리 손놓았던 것이다. 왜놈 아래 본의 아니나마 협조하면서 13만 권이라는 장서를 지킨 최남선(崔南善)과는 그렇게 성격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