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원교근공/ 누란의 위기/ 배수의 진/ 금성탕지

如岡園 2011. 7. 10. 23:42

          #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는 교분을 맺고 가까운 나라는 침공한다는 진(秦)나라의 국시(國是)이자 천하를 통일한 지도 원리.

 위(魏)나라의 책사(策士) 범휴(范휴)는 남의 나라와 내통했다는 무고로 말미암아 생명이 위태로왔으나 용케 진(秦)나라의 사신 왕계(王稽)를 따라 진나라의 서울 함양(咸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진나라의 운명은 달걀을 쌓아올린 것보다도 위태롭다"는 등의 솔직한 말이 환영을 받지 못하다가, 진나라의 재상이 먼 강대국인 제(齊)나라를 치려고 꾀하자, 왕계를 통해서 왕에게 올린 글이 계기가 되어 소양왕(昭襄王)은 예의를 갖추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범휴는 아뢰기를

 "한(韓) 위(魏) 두 나라를 건너서 강대국 제나라를 치시려는 건 이롭지 않습니다. 자기 나라의 군사를 절약하고 한나라와 위나라 군사를 전면적으로 동원 하시려나 본데 동맹국인 두 나라가 믿을 수 없는 줄 알면서도 그 나라들을 건너서 공격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나랏님께서 취하실 방법으로서는 먼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나랏님의 촌토(寸土)요 한 자의 땅을 얻으면 나랏님의 척토(尺土)가 아니겠습니까?"

 범휴는 진나라의 객경(客卿)이 되고 더우기 재상이 되어 군사를 온통 장악하게 되었다.

         

          # 누란(累卵)의 위기(危機)

 달걀을 쌓아올린 듯한 매우 위태로운 상황을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장기(長技)가 있는 자는 누구나 실력으로써 출세하려고 애썼다. 개중에서도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어지는 변설사(辯舌士)는 여러 군주를 찾아다니며 유세하는 것이니 그 지위가 매우 높았다.

 위(魏)나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범휴(范휴)도 종횡가가 될 것이 소원이었는데, 아무리 실력주의 세상이라 해도 느닷없이 출세의 실마리를 찾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고향의 중대부(中大夫)인 수가(須賈)를 섬겼는데 그를 따라 제(齊)나라로 사신이 되어 갔을 때 부하인 범휴가 도리어 수가보다도 평판이 좋았다. 그래서 귀국 후 수가가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齊)에게 모함을 하였다.

 "네놈이 제나라와 내통을 했으렷다?"

 하고 범휴는 붙들려 가서 호된 매질을 당하였다. 갈대발로 말아다가 변소에 쳐넣는 욕도 당하였다. 그러나 범휴는 가까스로 정안평(鄭安平)이라는 동정자에게 문지기를 보내어 그에게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이름도 장록(張祿)이라 고치고 진(秦)나라로 갈 기회를 노리던 중 진나라 소왕(昭王)의 사신 왕계(王稽)가 나타났다. 왕계는 장록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위나라의 장록 선생으로 말하면 천하의 외교가이온 바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하여 '달걀을 쌓아 올리느니보다도 더욱 위태롭다'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자기를 등용하면 정치가 탄탄하리라 하옵기에 소신이 선생을 모시고 왔습니다".

 진나라의 왕은 이 불손한 나그네를 구태어 처벌하려고는 않고 뜨내기 나그네로서 둬두었다. 그러나 범휴가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배수(背水)의 진(陣)

 강을 뒤로 하고 진을 치면 적은 정면에서 공격해 오고 뒤에는 강물이니 물러서면 빠져 죽을 판이라 사력을 다해 적을 무찌른다는 전법.

 한고조(漢高祖)가 제위(帝位)에 오르기 2년 전(BC 204) 일이다. 한신(韓信)은 위나라를 무찌른 여세를 빌어 조(趙)나라로 진격하였다. 그래 조나라 군사 20만이 정경(井경) 땅의 좁은 길목에 집결하고 굳건한 성을 쌓고 대비하고 있었다.

 한신은 정경 땅 어구에 이르자 경기병(輕騎兵) 2천명에게 한 자루씩 깃발을 주고

 "그대들은 저 성 근방의 산에 잠복해 있으라. 우리 군사가 도주하는 척하고 물러나면 적은 전력을 다해 추격해 올테니 그대들은 그 사이에 성으로 들어가서 적의 깃발을 거두고 우리 군사의 기를 꽂으라"

 한신은 또한 만여명의 군사를 강물을 뒤로 하고 포진(布陣)한 다음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좁은 길목으로 진격케 하였다. 강물을 뒤로 하고 포진한 한군을 보고 조나라 군사들은 자못 비웃었다. 드디어 몇 차례의 가축전(角逐戰) 끝에 한군은 예정대로 후퇴하여 '배수의 진'에 합류하니 조나라 군병은 한신의 목을 베겠다고 온통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성채(城寨)가 빈 사이에 잠복해 있던 한신의 경기병 2천명이 성으로 들어가 성벽의 깃발들을 온통 갈아 꽂았다.

 한편 강물을 뒤로 하고 포진한 한군 만여명은 물러날 여지가 없는 까닭에 필사적으로 싸웠으니 조군은 다시 성채 안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기네 성채에는 어느새 한군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거기서도 한군이 공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앞뒤로 한군의 공격을 받아 조나라 군병 20만은 참패하고 말았다. 

 싸움이 끝난 축하연에서 부하 장수들이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며 싸우라고 했습니다. 한데 이번에 강물을 등지고 싸우신 까닭은?"

 "어느 병서(兵書)에 보면 자신을 사경(死境)에 빠뜨림으로써 비로소 살아날 수 있느니라 하였소. 그 병법을 이번에 활용한 셈인데 왜냐면, 우리 군사는 워낙 원정(遠征)을 거듭해 왔던 만큼 온통 보충병으로써 이루어진 군병이오. 그러니 생지(生地)에 놓아두면 결속이 안될 것이 뻔하지 않소?"

 

          # 금성탕지(金城湯池)

 끓는 물(湯池)에 에워싸인 강철 성(金城)이라는 것이니 침공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전국(戰國)의 난세를 통일하고 대 제국이 된 진(秦)나라도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2세 황제가 등극하자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하여 여러 곳에 잠복되어 있던 전국시대 6강국의 종실(宗室)과 유신(遺臣)들이 진나라를 타도하려고 일어섰다.

 그 무렵 무신(武臣)이라는 자가 조(趙)나라의 묵은 영토를 휩쓸고 봉기하여 스스로 무신군(武臣君)이라 일컬었다.

 그것을 본 괴통이라는 논객이 현령(縣令)인 서공(徐公)에게 아뢰었다.

 "나으리께선 매우 위험한 처지에 계십니다. 그러나 소인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올시다".

 서공은 물었다.

 "어째서 위험하단 말이오?"

 "나으리께선 현령이 되신지 10여년이 되셨습니다만 그 동안에 진나라의 형별이 가혹한 탓으로 백성들이 진나라를- 아니 직접적으로는 나으리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위엄이 오늘날처럼 몰락하고 보니 백성들은 이제야말로 나으리를 죽여서 원한을 풀고 공명을 떨치려고 벼르는 참이올시다".

 "그렇다면 어쩌면 좋겠소?"

 이에 괴통은 서공에게 다가앉으며 대답하였다.

 "소인이 나으리를 대신하여 무신군을 만나 투항해 오는 현령들을 우대하도록 설득시키겠소이다".

 "무슨 수로 그렇게?"

 "여러 군현(郡縣)들을 일일이 무력으로써 침공하려면 희생이 막대할 것이므로 투항해 오는 현령을 깍듯이 대접하도록 하는게 상책이라고 설득시키렵니다".

 "흐음...... 과연 설득이 될까?"

 "되고말구요. 가령 현령을 소홀히 다룬다거나 혹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한다면 여러 군현마다 죽기 한정하고 성곽을 굳건히 지킬 것이니, 그야말로 끓는 못물(湯池)에 에워싸인 강철 성(金城)이나 같을 거라고 타이르면 될 것이올시다".

 서공은 기꺼이 괴통을 무신군에게 보냈던 바 무신군은 과연 괴통의 말을 합당하게 여겨 범양(范陽) 현령 서공을 맞아 우대하는 한편 여러 군현에 투항을 종용하는 사신을 보내니 화북(華北)에서만도 투항해 온 군현이 30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