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존염은 표장부/체할라 버들 잎 띄워 물좀 먹고/지화난독/문래

如岡園 2012. 5. 21. 10:15

          # 존염은 표장부(存髥表丈夫)

 '구레나룻 수염이 있다는 것은 대장부의 표시이다'.

 조선초 이성계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도와 공이 컸던 이지란(李之蘭, 여진 본명으로는 퉁豆蘭)이 태조의 등극 후 벼슬을 물러나며 한 말이다. 대장부는 처신이 분명해야 함을 뜻한 말일 것이다. 

 한(漢)나라 창업 때 공신의 한 사람인 장량(張良)이 사업의 성취와 함께 신선도를 좇아 신명을 보전한 것이 좋은 얘깃거리로 전한다. 한신(韓信)이 모양 끝내 붙어 있다가 죽음을 당한 것에 비하여 확실히 현명한 처신이었다는 얘기다.

 이지란은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오자 머리 깎고 중이 되어 가며 상소 가운데 상투를 잘라 넣어서 뜻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보였다. 

 이와 같은 말을 한 분이 또 있으니 하나는 세종의 지우를 끝내 잊지 못해 단종 손위 후 중이 되어 방랑한 매월당 김시습이 그다.

 또 한 분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사신 갔던 사명당 유정(惟政)이 그다. 

 그가 대장 가등청정을 만났을 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있기는 있으되 너희 나라에 있다."

 "무엇이냐?"

하니까,

 "너의 머리가 그것이다(若頭爲寶)"

하여 일본에 갔을 때도 '보물 얘기한 스님(說寶和尙)'이라 하여 숭앙을 받았다. 중이면서 수염을 기를만큼 그는 역시 호기남아였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이른바 킹 메이커들이 귀담아 둘 이야기가 아닐지.

 

          # 체할라 버들 잎 띄워 물좀 먹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폭군인 연산군때에 이장곤(李長坤)이라는 교리(校理) 벼슬 하는 이가 있었다. 임금에게 미움을 사서 거제도로 귀양을 가 있었는데, 날이 갈수록 세상이 어수선하여 이제 더욱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 몰래 탈출하여 지향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함흥 지경에 이르러 어느 우물가 물 긷는 처녀 아이를 보고 물 한모금 먹게 해 달라고 청했더니, 물을 한바가지 떠 들고 손님 얼굴을 흘낏 쳐다 보더니 옆의 버드나무 잎을 주루루 훑어 띄워서 준다.

 목 말랐던 끝에 물을 당해 시원하게 마시려고 하면 버들잎이 섞여 들고 그래 불며 불며 한참만에야 마실만큼 마셨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래 버들잎을 띄운 내력을 물으니까 하는 말이,

 "냉수에 체하면 약도 없답니다. 보아하니 손님께서는 너무나 기갈에 지쳐 계신데 갑자기 찬물을 자시고 병나실까 겁나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을 뿐입니다."

 그래 그 아이의 집을 물으니 사회에서 천시받는 고리백장의 집이었다. 잘 말하여 그 색시에게 장가들고 그 집 사위가 되었으나 한가지도 일을 도울 줄은 몰라 무진한 천대를 받다가 중종의 반정을 만나 서울로 돌아오고, 천한 출신이지만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여 해로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의 사마광(司馬光)이 독을 깨뜨려 친구를 구했다는 얘기만큼이나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들려 줄만한 얘기라 하겠다.

 

          # 지화난독(紙畵鸞犢)

 삼국유사에 이런 얘기가 전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고구려를 쳤을 때, 나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성 밖에 주둔하고 통지하기를, 급히 군량을 날라 오라고 하였다.

 왕이 군신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적진을 통과하여 양곡을 보내기가 장히 어려운데 어떻게 할 것인가고. 김유신 김인문 등이 양곡 2만섬을 전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이제 양군이 힘만 합치면 되게 되었다.

 먼저 연기(然起) 병천(兵川) 두 사람을 파견하여 서로 합세할 작전을 물었더니, 종이에 난조(鸞鳥, 봉황과 비슷하다는 전설상의 새)와 송아지를 그려서 돌려보냈다. 수수께끼로 이 나라에 사람이 있는가를 시험하는 수작이다.

 그래 원효대사에게 묻게 했더니 '속환(速還)'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내렸다. 종이 '지(紙)'자의 첫소리(그 당시 음으로는 ㅅ)를 따고 송아지 '독(犢)'자의 아래 음절을 따붙이면 반절(反切)식으로 맞춰 '속'이란 음이 된다. 또 그림 화(畵)'자 위에 난조새 '난(鸞)'자의 받침을 따 붙이면 '환'. 그러니까 속환(速還), 빨리 되짚어 오라는 뜻이 된다. 

 그래 김유신이 군대를 독려하여 대동강을 건너고 이튿날 갑자기 돌이켜 고구려 병을 좇아서 수만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 문래(文萊)

 고려조 말엽에 문익점(文益漸)이란 분이 있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무엇이 잘못 되었든지 벌을 받아 멀리 교지(交址)까지 귀양을 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밭에 허옇게 핀 이상한 꽃을 여인들이 줄로 서서 수확하는 것이 아닌가?

 물으니까 그것으로 실을 자아 옷을 짜 입는다는 것이다.

 씨를 받았더니

 "이것은 국금(國禁)이라 외국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도로 뺏는다.

 그 때 살짝 씨앗 세 개를 손새에 감춰서 갖기는 하였는데 가져올 도리가 없다. 글씨 쓰던 붓대 속에 넣어 귀양이 풀린 뒤 무사히 가지고 돌아오긴 했으나 처음 일이라 작물의 성질도 재배법도 모른다.

 그래 봄에 그 세 개의 씨앗을 열흘 간격으로 하나씩 심었더니 둘은 죽고 곡우 때 심은 하나만이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컸다. 이것이 개화되도록까지의 우리나라 목화의 시조가 된 것이다.

 목화를 수확하게 되자 씨 뽑는 기계를 생각해내고 여러 모로 민생에 도움을 주었는데 그 손자 문래(文萊)라는 분은 처음으로 실 잣는 기계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명칭이 없어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문래(물레)'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