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농경의례(農耕儀禮)

如岡園 2012. 11. 14. 11:27

 한국인으로서 한국인다운 특성을 풍기는 요소가 여러가지 있겠으나, 시절에 따라 지켜가는 세시풍속만큼 절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풍속은 제도적으로 의식된 체제가 아니고 하나의 민족적인 냄새이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기 쉽지만 그 속에서 자라온 사람으로서는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때 곧 향수에 젖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의 대표적인 것은 시절 따라 지켜지는 세시풍속, 즉 연중행사인데 음력이 중심된다.

 해[歲]를 계산하는 역법(曆法)에는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태양력과 달을 기준으로 삼은 태음력이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우리의 서민문화가 전통적으로 음력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생활풍속 속에는 음력이 관념적으로 지배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은 정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보름에 걸쳐 집중되어 있다. 섣달 그믐께부터 일련의 계속적인 축제가 진행된다. 이는 중국에서 역법이 수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전승 발전시켜 내려온 원시 농경사회의 유습이라고 믿어진다. 후대에 역법이 차용되면서 원시 농경사회의 봄맞이축제가 원단(元旦, 설날아침)과 상원(上元, 정월보름)에 결부된 것이라 생각된다.

 농경민족은 초목이 싹트는 봄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고, 열매를 맺고 떨어지는 계절을 한 해의 끝막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농경의례는 대체로 풍년을 비는 예축제(豫祝祭), 농경과정에서 농신에게 비는 중농제(中農祭), 그리고 추수를 하고 나서 신에게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제(秋收感謝祭)로 나눌 수 있다.

 예축제는 주로 정이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기풍(祈豊)과 점풍(占豊)에 관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은 나무 시집보내기[嫁樹], 십이지일[十二支日], 용의 알뜨기, 달집태우기, 보리뿌리점[麥根占], 볏가릿대[禾積, 禾竿], 줄다리기, 안택(安宅), 동신제(洞神祭), 영등할머니 모시기 등이다.

 농경예축제에 비하여, 농사를 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중농제는 아주 드물거나 간략한 주술 정도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유두날에 밀전병을 부쳐 논에 바치는 것이 있으나, 그보다는 실제로 농사짓는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술을 대접하는 풍속이 더 보편적이다. 이를 호미씻이, 술멕이놀이, 머슴날, 농부의 날이라 하여 농군들은 농악을 치면서 놀게 하고 술과 음식을 내어 흥겹게 대접하는 것이다. 의례라기 보다는 실제적인 놀이라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추수감사제는 팔월 추석에 조상에게 차례(茶禮) 올리는 것과 안택고사(安宅告祀)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민속적인 추수감사제를 영 호남 지방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으니 '올베심기'가 그것이다. 이는 '올게심니'라고도 하는 것으로 햇곡식(벼) 가운데서 잘된 것을 가려 이삭을 뽑아 가마솥에다 말려 떡과 밥을 만들어 첫물로 조상에게 바치는 풍속이다. 보통 7~8월 중에 택일하여 안방에 차려놓고 의관을 정제하여 제사를 드리는 천신(薦新)이다. 이는 추석과는 달리 천신하는 것으로 중부지방에서 시월에 고사지내는 풍속과 비슷하다.

 고사란 굿보다 소규모의 정성을 말하며, 같은 어원에서 생긴 말일 것이다. 시월은 상달이라고 하여 굿과 고사가 많은데, 호남지방에서는 농악을 굿 또는 매굿이라 하는 점이나, 부락제인 당산제에 매굿을 치는 점으로 보아 매굿이 산제(山祭)를 의미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고사가 소규모의 개인 가정적인 신앙인데 비하여 굿은 대규모의 신앙의례임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도 고사를 크게 지내니, 예를 들면 덕수궁에 고사를 지내는데 한 번에 지낼 수가 없어 4월과 5월 두 달로 나누어 지냈던 것이다.

 고사에는 주로 시루떡, 탁주, 북어를 바치는데, 각기 신들의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 가장 기본적인 제물은 시루떡인데 천신(天神) 또는 산신(山神)에게 추수의 감사를 바친다는 뜻이 깊은 것이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떡국을 먹으면서 나이를 먹었다. 때로는 별미(別味)로 해먹었고, 때로는 제사나 고사에 바친다 하여 해먹었다. 속담에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느니 '귀신 듣는 데 떡 소리 못한다'는 따위의 말은 우리가 얼마나 떡을 중요한 제물로 여기는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떡을 별미로 먹거나 제물로 사용하지만 고대에는 갈무리에 편리했던 점으로 주식으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김해 패총에서 1세기 경의 시루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꽤 오래 전부터 시루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측이 되는데 시루를 사용해서 만든 음식을 신에게 바치던 유습이 그대로 지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떡의 전통적인 것은 시루떡이고 보다 원시적이고 종교적인 떡은 백설기다. 백설기란 떡가루 외에 별다른 고물을 넣지 않고 익혀 먹는 아주 단순한 과정만으로 만든 것이다. 굿은 물론 고사에 있어서 시루떡과 백설기가 주 제물이 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이 농경민족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집의 마루에는 성조신, 뒤꼍에는 터주신, 대문에는 수문장신 등 신의 신격과 위치대로 떡과 술을 차려놓고 축원하는 것이 고사인데, 때로는 무당이나 봉사를 불러 간단한 굿을 하기도 하니 이를 안택굿이라 한다.

 농경의례를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농경민족이었던가를 알 수 있고 대부분의 우리 민속은 농경의례와 밀접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양재연 외3인 공편 <한국풍속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