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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가(采薇歌)/청담(淸談)/수어지교(水魚之交)

如岡園 2013. 11. 1. 22:32

          # 채미가(采薇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가 의를 지켜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먹다 죽은 수절(守節)을 일컫는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는데 고죽군은 아우 숙제에게 대를 물려 주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제가 대를 잇는 건 예의가 아니라 하여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다. 하나 백의는 그것이 아버지의 유지(遺志)에 어긋난다 하여 사양하다 못해 고국을 떠나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뒤를 이어 고국을 떠났다.

 두 형제는 진작부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인덕을 존경했던 까닭에 서쪽인 주나라로 갔다. 하나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문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정세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문왕의 대를 이은 무왕(武王)이 군사를 모아 중국의 북녘을 제압하던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치려하였다. 

 무왕은 군중의 수레에다 아버지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었는데, 백이와 숙제는 진군하려는 무왕의 말을 양 옆에서 만류하며 말리었다. 

 "부왕의 제사도 치르시지 않고 싸움터로 나서면 어찌 효자의 길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주왕으로 말하면 당신의 임금이시니 신하의 몸으로서 임금을 죽인다면 어찌 어질다 하겠습니까."

 하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은나라를 무찔러 천하를 제압하였다.

 여러 곳의 군주는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섬기는 세상이 되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무왕에게서 아무런 덕망도 찾을 길 없어 그를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신의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말자고 맹세한 두 사람은 멀리 민가를 떠난 수양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고사리로써 목숨을 이었다. 

 그들이 지은 <채미가>에는 세상을 근심하고 원망하는 회포가 보이는 바, 그들은 옛날의 성왕(聖王)이었던 신농(神農), 순(舜), 우(禹)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마침내 굶어 죽었다고 한다. 

 

          # 청담(淸談)

 세속의 명리나 희비를 넘어선 고매한 정신세계를 주제로 하는 청신한 얘기.

 위진(魏晋,3세기 후반) 시대에 이른바 죽림(竹林)의 칠현(七賢)이라 하여 그 기교방달(奇矯放達)한 언행으로 세상에 알려진 일곱 선비가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권력자와 또한 그에 추종하는 무리의 비루한 생활태도에 반발하고 기만적인 유교 등의 속박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짐짓 야릇한 언행을 농하면서 술에의 도취와 초속적(超俗的)인 노자 장자 사상에의 심취에 몸을 맡겼다.

 그들은 대숲에 모여 술에 취해서 청담을 나누었다는데 그렇게 행동을 같이 한 시기는 짧았던 모양이요, 그 대숲이 당시의 수도 낙양(洛陽) 근방이라지만 석연치는 않다. 다만 그들의 이름을 높여준 것은 술에의 도취요, 그럼으로써 혼탁한 정치사회에서 몸을 지킨 점이며 기성도덕에 대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7현 중의 일인이었던 완적(玩籍)은 날이 날마다 미역감듯 술을 마시고는 속물이 찾아오는 것을 백안시(白眼視)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완함(玩咸)이란 이는 돼지와 함께 큰 독의 술을 마셨고 유령(劉伶)이란 이는 취하면 집안에서 발가벗고 딩굴며 찾아오는 이에게 이죽거렸다.

 "내게 있어서는 천지가 집이요, 이 오두막집 따위는 고의에 불과한데 자네는 어째서 남의 고의 속으로 들어오는 거야!"

 

          # 수어지교(水魚之交)

 군주와 신하와의 사이 혹은 남편과 아내와의 사이가 친밀함을 말한다.

 이른바 삼국 정립(三國鼎立)의 시대, 곧 조조(曹操, 魏), 손권(孫權, 吳), 유비(劉備, 蜀) - 그 중에서도 유비의 득세는 가장 늦었다. 그에게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의 용장이 있었으나 더불어 책략을 세울 만한 인재가 없었다. 그것을 통감한 유비가 착안한 인물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었던 것이다. 

 공명은 전란을 피하여 산중에서 초가를 짓고 은둔해 있었는데 유비는 두 차례나 그를 찾아갔으나 부재중이라서 만나지 못했다. 유비는 만류하는 관우와 장비를 뿌리치고 세번째 찾아가서 공명을 만났다.

 "이미 한실(漢室)은 기울고 간신이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나는 외람되게도 천하에 대의(大義)를 펼 뜻을 지녔으면서도 지혜롭지를 못해서 하는 일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나 아직 뜻은 버리지 않고 있지요. 아무쪼록 도와 주십시오."

 세 차례나 예방했다 하여 삼고지례(三顧之禮)라 일컫는 바 공명도 그에 감동하여 유비를 위해 일하기로 작심하였다.

 비록 난세를 피하여 산중에 묻혀 지냈다고는 하나 세상을 보는 눈은 유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날카로왔다. 유비가 묻는 데 답하여 공명은 한실 부흥의 대계(大計)를 이야기 하였다.

 "형주와 익주를 장악하여 근거지로 삼고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위무해서 후환을 덜고, 안으로는 부국 강병에 힘쓰면서 밖으로는 손권과 동맹하여 조조를 고립시켰다가 때를 보아 조조를 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한실 부흥책이올시다".

 유비의 신하가 된 공명은 이 기본정책에 따라 일을 추진하다가 미처 성공을 못보고 전사하였다.

 그 동안에 유비는 공명을 스승으로 모시고 침식을 같이 하였다. 공명 또한 온갖 힘을 기울여서 유비를 도왔다.

 애초에 관우와 장비는 27세 밖에 안되는 공명에게 대한 유비의 심취(心醉)를 시기하여 공명을 지나치게 존경한다고 비난하였다. 그 때 유비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이나 같다. 바라건대 다시는 그런 말 말아다오."

 이는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얘기.

 또한 관자(管子)에 보면 친밀한 부부 사이를 이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