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을 하는 노년이 너무 길다. 생활인으로서의 삶의 시침을 2003년 2월 25일 정년 퇴임사를 끝으로 하여 정지시켜버린 판단착오에서 비롯된 업보다.
"신설 초기의 대학에서 건설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개척을 한다는 열정 하나로 모든 열악한 교육환경을 극복하고 희망적인 미래를 열어갔다.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던 80년대 중반의 어지러운 세상속에서 가슴아픈 상처의 추억도 있었다. 흑백논리의 와중에서 부정적인 입장으로 파괴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배제하고 주어진 현실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긍정하면서 살았고 주변을 다독거려 대학 발전에 한 몫을 감당하였다.
성장해 가는 과정의 대학에서 교단에 서서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를 하는 일 말고도 크고 작은 보직에 보임되어 내가 겪었던 일들은 조직사회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마찰을 빚지 않고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터 간다는 것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위 아래를 둘러보아 모나지 않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나가고 용납해야 할 것은 용납하면서 한 가족이 공존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삶에서 비롯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약관의 나이로 신설되는 대학에 처음으로 몸담아 대학의 성장과 궤적을 같이 하면서 교수로 성장하여 정년을 맞이하는 감회는 남다르다.
듣기 좋은 말로 인생은 지금부터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학업을 수행하는 사람이 졸업을 해 나갈 때에나 해당되는 말이고, 필생의 직업을 졸업하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무사와 안녕이 지상의 과제로 남을 뿐이다.
건강에 조심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사람은 회고의 정에 남다른 법. 그리하여 노년의 인생은 추억을 먹고 사는지 모를 일.
격동의 시기에 일취월장하는 속도로 급성장했던 대학의 위력과 잠재력에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앞으로 더 크게 발전해가는 우리 대학의 면모를 바깥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보겠다. 2003. 2. 25 (퇴임사 내용요약)"
그러고서 금년으로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위무용의 세월!
노후의 생활 설계를 재직시기부터 서둘러대던 주변 동년배는 서둘러댔던 만큼 저 세상에도 서둘러 갔다.
무위무책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글픔을 넘어 쓸쓸함을 안겨 준다.
100세 시대의 노후 대책, 정년 퇴직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되고, 그야말로 그것이 새로운 생활의 명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세상살이에서는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 있어서는 안될 사람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청년시절부터 명심하고 이 중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고 그런 논리를 대학 강단에서 후진에게 펴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의 부류에 들고 만 것 같아 안타깝다.
허무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최고의 여러 가치가 보잘 것 없이 되어버리는 것, 목표라는 것이 없어지고 '왜?' 라고 하는 물음에 대해서 대답이 없는 것, 어떤 권위 앞에도 굴하여지지 않고 신앙상의 어떤 원칙도 취하여지지 않는 자! 승인되어진 최고 가치가 보잘것 없다고 느껴지는 허무주의.
투르게네프나 니체의 니힐리즘의 변죽도 울리지 못하면서 설익은 무위에 빠져드는 노후의 무사안일이 지겹다.
만물의 무상성을 주장하는 불교에도 못 미치고, 문명과 현실을 부정하는 노장(老莊)의 도교에도 문외한이면서 아나키즘(Anarchism)을 동경하는 작정 없는 지식인, 그런 노후가 되어버린 인생은 서글프다.
전공 영역인 인문학 그것도 한국 고전 문학의 위상이 좁혀든 현실에서 생리적 생명만이 길어진 자화상을 무엇으로 변호한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은 사람의 일이며 사람이 있어야 모든 것이 이루어지며 사람이 되어야 일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의 몰락은 인류의 몰락을 예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의 부활은 다음 세대의 자명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달이 차고 기울고 또 둥그러지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 참여에 급급하지 않고 미처 깨닫지 못한 철리(哲理)를 터득해 은인자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시점에서 참 여러 가지로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2016년 1월 11일 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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