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전설의 사회사/효양산 전설 3종

如岡園 2016. 4. 13. 14:32

 민담과 함께 설화 문학의 한 갈래인 전설은 그 향유 계층이 자연환경, 역사적 사실, 인물의 행적, 주변의 사건 등에 대하여 직접 재해석하면서 전승되기 때문에 역사인식과 시대정신이 바로 투영됨으로써 사회적 의미가 크고 깊다.

 

 내가 사는 읍내의 안산(案山) 격이 되는 효양산(孝養山,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소재)에는 전설이 많아 특이한 데다가 이를 기리는 행사마저 유별나서 애향심이 남다르다. 

 이 곳에 거주지를 옮겨 살게 된 당초에는 '효양산 전설문화축제'라고 하기에 지방자치단체에서 축제거리가 얼마나 없어 하찮은 전설을 가지고 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여 놀이판을 벌이는 구실로 삼고 있는가 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알아보니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전설 내지는 민담 3편, 즉 <사슴과 나무꾼 이야기>, <효양산 금송아지 전설>, <물명당과 화수분 전설>의 현주소가 바로 이곳임을 확인할 수 있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산맥도 없는 평야지대, 산 주변 둘레길 3킬로, 해발 187.5 미터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산에 자연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묵직한 중량감이 드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15년 9월에는 이 효양산에 '효양산 서희테마공원'이 조성되고, '효양산 전설문화축제'가 11회째를 맞이하면서, 이 효양산의 전설이나 민담이 턱없는 허구가 아닌 민족적 사회적 삶의 생생한 발자취이며 그것이 곧 향토민의 자부심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슴과 나무꾼 이야기>는 고려 때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문헌으로 근거하고 있고 서신일의 묘가 증거로 남아 있다.

 

 "서신일은 통일신라 말기 아간 벼슬을 하던 사람인데 효양산 언저리에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서신일이 들에서 일을 하는데 화살이 꽂힌 사슴이 쫓겨 들어와서, 화살을 뽑고 사슴을 숨겨 주었더니 사냥꾼이 사슴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하는 말이,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은혜로 죽지 않았으니 그대 자손이 대대로 벼슬길에 오르게 하리라 하였다. 신일이 나이 80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필, 필의 아들이 희요, 희가 눌을 낳았는데 과연 신인의 말과 같이 태사가 되고 내사령이 되었으며 모두 고려 종묘에 배향되었다."

 

 이것이 <역옹패설>에 실려 있는 '사슴과 나무꾼 이야기' 전설의 원형(原形)이다 .

 서신일의 묘역은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 19번지 효양산에 이천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고, 그 전설은 여러 갈래로 양태를 바꾸어가며 전해지고 있다.

 

 <효양산 금송아지 전설>은 효양산에 전설처럼 남아 있는 금광굴과 효양산의 이칭인 수양산 및 신라 시대의 토성지(土城址)에서 유추(類推)되고 이천시 일원의 지명전설과도 복합된 아주 재미있고 그럴듯한 전설이다.

 

 "신라는 효양산에서 캐낸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제기로 사용하였는데, 당나라 황제의 세숫대야에 이 금송아지가 비치자 신라 남천주 효양산에 있는 것임을 밝혀내고 이를 탈취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했다. 이 때 신라 역시 금송아지 위치 문제로 의견이 분분한데, 여왕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금송아지를 남천주 효양산에 묻고 근방의 지명을 알려주는 대로 바꾸라고 하자 여왕은 이를 실행한다. 백발노인은 당의 밀사를 지금의 용인시 내사면 양지리에서 만나 자신을 효양산에서 오는 길이라며 위치를 알려주는데, 여기서 조금만 가면 오천역 억만리가 나오며 그 후엔 이천역을 지나 억억다리를 건너 구만리들을 지난 후에야 효양산이 있다고 한다. 당의 밀사는 몇천 개의 역과 몇억 개의 다리를 건너 구만 리를 더 가야 한다는 말에 그 먼 길을 어찌 갈 수가 있겠는가 하고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이 '금송아지 전설'의 내용인데, 그 후 신라는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니 효양산 금송아지를 통해 국운을 발흥시키려는 국가적 책략이 돋보이는 전설이다.

 또 금송아지 전설에서 거명된 오천역은 현실적으로 이천시 마장면 소재지이고, 억만리는 마을 이름이며 억억다리는 한 개의 다리 이름, 구만리들은 복하천 부근 작은 평야지대이니, 전설적 사건과 지명을 교묘하게 얽어 짠 전설로서의 걸작이다.

 금송아지가 묻혀 있다는 효양산에는 금광굴이 있어 현실적으로도 금을 캤던 일이 있고, 효양산은 산 능선을 경계로 한 토성지(土城址)의 흔적도 있어 신라 때의 북방 수자리 구실을 한 거점이었음도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 두 설화에서 '사슴과 나무꾼 이야기'가 민담적 성향이 두드러지다면 '효양산 금송아지 전설'은 그야말로 전설의 전형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전설은 민담에 비하여 주로 어떤 증시물(證示物)을 내세워 자연과 인간사를 밝힌 설화라고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전설적 요소와 민담적 성격이 배합을 이루면서 비교적 분포지역이 넓은 <물명당과 화수분 전설>은, 효양산에 있는 '물명당약수터'를 근거로 자생한 전설이다. 

 효양산은 해발 2백 미터가 미처 안 되는 들판 가운데의 작은 산으로 계곡다운 계곡이 없어 샘물이 없는 산인데, 유독 산 정상 가까운 곳에 샘이 하나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니 신통한 일이었을 터.

 이것을 두고 전설은 두 갈래로 가닥이 잡혀 형성된다.

 그 하나는 풍수지리의 명당 찾기 관념이 낳은 전설이다. 즉,

 

 "산신(山神)이 산제를 정성스럽게 지내는 이에게 꿈에 자손의 부귀영화가 있을 명당자리를 일러 주면서 관을 너무 깊게 묻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는데, 후에 부친상을 당해 그 곳을 파자 깊지 않은 곳에서 암반이 나왔다. 암반을 깨자 물줄기가 솟구치고 금붕어가 튀어나왔는데 한 쪽 눈에서 피가 흘렀다. 할 수 없이 다른 곳에 안장을 하였고, 불행하게도 그 집안은 대대손손 한 쪽 눈을 상하는 기이한 내력을 가지게 되었다.

 

는 것인데 명당자리를 찾아 조상을 모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풍수지리는 섣부른 인력으로 좌우되지 않음을 암시하는 예화가 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쓰고 써도 복이 쏟아져 나온다는 그릇인 화수분 개념의 전설이다.

 

"선량한 나무꾼이 효양산 은골 골짜기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낫이 무디어지자 낫을 갈기 위해 물을 뜨러 갔는데 마침 풀숲에 사발이 있어 그 곳에 물을 길어 담아 낫을 갈았단다. 물을 쓰면 쓰는 대로 차올라 마을로 내려온 나무꾼이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한 노인이 무릎을 탁 치며 그 그릇은 쌀을 넣으면 쌀을 쓰는 대로 가득 가득 담기고 금을 넣으면 금이 하나 가득 생기는 화수분이라고 하였다. 이튿날 나무꾼과 동네 사람들이 그 사발의 있던 곳을 찾아갔으나 그 사발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수분은 천성이 착한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샘물이 없을 법한 곳에 기이하게도 맑은 샘이 솟아나는 자연 현상에 대한 인심의 향방이 이와 같은 화수분 전설로 나타난 것이다. 전영택의 단편소설 <화수분>의 배경이 경기도 이천의 바로 이웃인 양평인 것도 이 효양산의 화수분 전설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같은 효양산 전설 특히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전설은 역사인식과 시대정신, 향토애와 관련하여 지역문화를 선양하는 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신일이 사슴을 구해주었다는 전설적 소재와 관련해서는 지명유래에도 관련된다. 서신일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인 서목은 이천지역의 호족(豪族)으로 역시 효양산 밑에 살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 안동에 있던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이 지역을 통과할 때 복하천에 도달했는데 마침 홍수로 강이 불어 건널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서목은 이천 고을 백성과 군량미를 대동하고 적극 맞이하여 왕건의 군사를 인도하여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 주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왕건은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이름을 내려, 이로부터 이천(利川)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서신일이 사슴을 살려주고 나이 80에 얻었다는 외아들 서필(徐弼)은 고려에서 개국정민공(開國貞敏公)에 봉해질 만큼 중앙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은 인물이고, 서필의 아들 서희(徐熙)는 이천 서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거란이 고려를 넘보기 시작하자 중군사로 북쪽 국경을 지키고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강동육주를 회복한 외교전략가로 이름이 나 있다.

 역사적 인물이어서 그런 전설이 따라붙었는지 사슴을 구해준 초인적 배려가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동인(動因)이었는지는 가릴 바가 아니지만 이 전설만큼 전설의 현주소가 뚜렷하고 역사적 사실 및 사회사적 의미가 분명한 전설은 드물 것이다.

 이런 뜻에서 전설의 현장에 서희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효양산 전설문화축제를 벌이는 일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전해 듣고 주변 사람들과 나눈 정화(情話)와 슬픔과 의지(意知)를 싣고 전해온 전설은 의연하게 자리잡은 풍토처럼 고유한 우리 삶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가와 지역의 역사를 전설 류(類)에 의존하면서 애국심과 애향심을 배양하고 사상과 감정을 대변하여 오지 않았는가.

 부귀를 희구하는 행복관, 충과 효, 열(烈)과 우애를 강조한 윤리관, 죽음 이후로 이어지는 생사관, 현실에서 좌절하면서도 꿈을 따라 사는 비극성과 희망의지, 국가와 마을과 씨족이 존속하는 생명력을 전설을 통해 엿볼 수가 있어 전설은 소중하다.    (2015. 12. 5. 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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