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浪漫)과 노망(老妄)은 상관관계가 없는 전혀 다른 말이면서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뇌리를 파고 든다. 로만(Roman)의 음역이 낭만으로도 되고 로망으로도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로만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속어 특히 프랑스 말을 의미하고 그 속어로 씌어진 설화를 의미하게 되었으며 그 내용이 중세 기사들의 모험적 무용담, 연애담으로서 황당무계한 것이 특징이다. 이 로만의 이전 형식은 로만스(Romans) 혹은 로만트(Romant)로서 그 어원은 라틴어 'Romanice'이다. 이 로망은 근대소설의 근원이 되며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로만스(Romance)가 되었다.
이 같은 소설사의 기원에 관심해서가 아니래도, 통상적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낭만'이나 '로맨스'라는 말은 감칠맛이 나는 말이다. 신문방송에서 게거품을 뿜어내며 떠들어대는 논객도 이왕이면 낭만논객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말도 있어, 추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터에서 꽃피는 젊은 남녀의 로맨스는 애절함이 있어 눈물겹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독일 태생의 반전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그런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병장 에른스트는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부모님의 생사도 알 수 없다. 자신처럼 홀로 남겨진 동창생 엘리자베스를 만나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학생 시절의 은사 폴만을 만나게 된 에른스트는 전장에서 막연히 느낀 전쟁의 무서움을 절실하게 실감하게 되고 휴가가 끝나자 에른스트는 사랑하는 엘리자베스를 남겨두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는데, 전쟁은 갈수록 패색이 짙어가고 병사들 간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전쟁의 와중에서 아내가 보낸 편지를 읽는 에른스트 글레버!
"강가에 있는 자두나무 옆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우리도 힘차게 살자고 했었죠.
우린 그러고 있어요.
제가 임신을 했거든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려고 하는 순간 에른스트는 자신이 구해준 지하조직원의 총을 맞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편지는 강물로 떨어지고 그도 다리 위 난간에 쓰러지면서 강물에 떠내려가는 편지를 잡으려 하지만 손이 닿지 않고, 생을 마감하는 에른스트의 처연한 모습만 강물에 비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슴을 쥐어뜯고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 장면이다.
이런 로맨스에는 감동이 따른다. 로맨스를 하는 대상이 젊기 때문이고, 상황이 절박하고 진지하기 때문이다.
낭만은 영성(靈性)과 감성, 진지와 해학, 지상과 천상, 죽음과 삶 등의 혼효(混淆)를 좋아하며 우주 속에 은폐된 혼돈을 중시, 우주의 비밀에 더 접근하여 경이의 창조를 중시한다. 미에 대한 열정, 감격과 꿈, 현실에 대한 외면과 반항, 혼돈과 몽환을 찬미하고 조화를 무시한 자유로운 세계에서 현실도피와 무한에의 동경을 갈망하는 것이 낭만이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의 무성한 나무와 삼림 사이의 길을 낭만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통행하는 한길은 비낭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 잎사귀 아늑히 드리운 꼬불꼬불한 시냇물과 넓게 흐르는 강물은 낭만이다.
낭만은 예술, 연애, 허무, 인생의 문제로 확산되는 사상이며 정조(情操)다.
낭만과 로맨스가 같은 줄기의 동의어이고 낭만이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우리는 유독 낭만이나 로맨스라고 하면 남녀 간의 사랑의 연애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개념의 낭만과 로맨스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가 낭만이라면 공상, 동경, 꿈, 이상과 같이 비실제적인 멋스러움 정도로 인식하는 반면에, 로맨스라고 하면 남녀 간의 사랑의 이야기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 보편적 사실이다.
감성과 이성의 경향에 따라 파토스적인 사람과 로고스적인 사람이 있듯이 낭만을 두고도 실제적인 사람과 낭만적인 사람의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낭만적인 속성은 그것이 비록 공상적 허구적이어서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매력이 있는 정조(情操)의 한 경향임엔 틀림이 없고 또 누구나의 마음에 조금씩은 공유되어 있게 마련이다.
낭만이나 로맨스가 남녀 간의 사랑의 이야기로 초점이 마추어진다고 할 때 그것은 젊음의 속성과 어우러지는 것이 정도(正道)일 것이다. 사랑의 이야기가 반드시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닐지라도 사랑을 하는 노인을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한때는 '로맨스그레이'라는 말도 있었고, 아버지가 늙었어도 낭만을 잃지 않고 있다고 해서 자식들이 로맨스 빠빠라고 별명을 지어 부른 라디오 방송 드라마도 있었지만 늙은이의 낭만이나 로맨스는 아무래도 코미디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정(癡情)에 가까운 노년층의 로맨스나 사기행각이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는 걸 보면 에로티시즘이라는 게 나이에 있어 그 한계성마저 모호한 모양이다.
늙어가는 사람만큼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면서 늙은이는 맹목적이 되어서, 가망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환상에 사로잡혀 분별을 잃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 쉽게 마련이다.
젊은 시절의 로맨스를 추억은 할지언정 늙어가면서 새로운 로맨스를 만들지 말라. 그야말로 낭만(浪漫)이 '로망(Roman)'이 아닌 '노망(老妄)'을 하게 되면 그것이 문제다.
100세를 지향하는 고령화의 시대, 아름다워야 할 로맨스가 노추(老醜)로 얼룩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스캔들의 천국이 아니겠는가.
미래가 없는 늙은이의 낭만은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주어 봐도 노망에 가까운 것이다.
로맨스가 인생에 활력소를 불어넣는 원동력이라면 노령(老齡)에 있어서는 이를 정신적으로 승화시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노인이 되어 참을 수 없는 것은 육체나 정신의 쇠약함이 아니라 기억의 무게에 견디는 것이라 한다.
과거로 회귀하여 노구(老軀)를 짓누르는 기억의 창고에서 젊은 시절 때 묻지 않은, 가슴을 애태웠던 아름다운 로맨스를 들추어 추억으로 반추하며 미소짓는다면 누가 뭐랄 것인가!
낭만은 공상적 허구적 연애를 지향하고 에로티시즘을 지향한다. 누가 말했던가, 아!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영원히 젊은 그대로를 지니고 있으면 하고......
전통은 눈처럼 흰 수염을 기르고 늙어 있고 로맨스는 늘 젊어 있다는데, 늙어가는 사람이 늘 젊어 있는 로맨스를 바라고 꿈꾼다는 것은 말이나 되는 것인가? 노망(老妄)이지. (2015. 8.15. 동인지 <길>16호.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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