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아리랑 고개의 정념(情念)

如岡園 2015. 11. 1. 13:57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먼저 신민요 아리랑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 "경기아리랑"을 떠올린다.

 전통 민요로서의 아리랑은 지역적으로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으로 대표되는 몇몇 종류가 있지만 그 민요적 원형성은 대동소이하다.

 아리랑은 푸념, 넋두리, 비창감이 서린 노래로서, 이 아리랑이 지닌 지배적 정서는 서러움, 애달픔, 원한, 이별, 향수, 그리움 같은 것들이다.

 '아리랑'이나 '아라리'란 어휘는 의미 없는 사설로 단지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여음으로 취급되겠지만, 거기에 '고개'가 덧붙어 '아리랑고개'가 되고 보면 지리적 환경을 떠올리는 의미소(意味素)가 더하게 되어 그 음악적인 정서도 노랫말에 이끌리게 된다.

 나를 버리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임이 한스럽고, 아리랑고개로 나를 넘겨 달라고 하소연도 한다. 그리하여 아리랑은 민요라는 범주를 넘어 보다 광범한 정서적 이야깃거리의 소재가 된다.

 

 아리랑고개는 꼬부랑 고개 길이다. 드넓은 외지로 향하는 통로다. 산골에서 대처로 나가려고 하면 산을 넘어야 한다. 산을 넘어 오르내리게 된 비탈진 곳이 고개이며, 그 고개에 이르는 길은 꼬불꼬불 꼬부라지기 마련이고, 그 꼬부랑 고갯길이 아리랑고개이다. 이렇게 보면 아리랑과 꼬부랑은 동일 개념의 상관성이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리랑고개는 아리랑을 부르며 넘는 고개가 아니라 그냥 꼬부랑고개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아리랑고개와 관련된 환경에 몸과 삶을 담고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경험론적인 실감이 거기에 깃들어지게 마련인데, 아리랑고개는 아리랑 노래만큼이나 많아 꼭 어느 아리랑고개가 원형이냐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른바 아리랑고개라고 일컬어지는 산 고개 밑의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고 지금까지도 깊은 연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아리랑고개가 전국의 여러 아리랑고개 중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바는 아니지만, 조선(祖先) 대대로 몇백 년을 여기서 살아오면서 아리랑고개라고 이름하여 왔으니 역사가 짧은 것은 아니다.

 예부터 서낭당이 있어 선방고개라고도 하던 꼬부랑 고갯길을 왜정 때 신작로로 확장하여 목탄차들이 빌빌거리며 다니던 자동차 길이었는데, 다른 곳으로 새 도로가 개설되면서 방치되고 나무꾼이나 목동이 넘나드는 농로로 퇴락한 길이 되고만 고개를 아리랑고개라고 하던 것만이 내가 아는 이 아리랑고개의 전부였다.

 나의 경험론적인 실감으로서 아리랑고개는 추억의 고개, 낭만의 고개, 회한의 고개, 상념의 고개이다.

 어머니가 가마 타고 시집왔다던 길, 고개 위 산 만당 하모니카 소리는 누구를 위한 세레나데였을까. 산까마귀 까악 까악하고 울어대는 해거름 후미진 산골길은 무섭기도 하던 길.

 "잘 가나?" "예, 잘 가요."

 어린 외손자와 외조모가 이별하며 외쳐대는 산울림이 귀에 쟁쟁한, 육친애가 서려든 곳.

 자동차 길을 내면서는 동네 뒤 산 준령을 훼손하여 복운이 달아나게 되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농로로 되돌려지면서 산줄기를 잇는다고 흙을 쌓고 풍물을 울리던 소리가 아련하게 기억된다. 등줄기가 휘게 나뭇짐을 져 나르던 고갯길, 목동의 피리소리는 무엇을 갈구하는 소리였던가. 

 6.25 전쟁의 와중에는 피아간 이름 모를 주검들을 가매장하기도 했던 외진 곳, 눈물마저 말라버린 청상의 맏누이가 유독 한이 많은 반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살았던 곳, 아련한 상념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리랑고갯길의 정점에 면한 우리 집 세전 텃밭은 나의 각별한 동심이 서린 곳, 청명한 가을날 밤나무 밑을 거닐면, 신종 알밤이 저절로 떨어져 꿀밤을 놓고, 까치밥 감 홍시가 주렁주렁 남겨진 여유 있는 풍요로움, 지금 생각하면 그 곳이 낙원이었다.

 성년을 넘어 가정을 이루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 곳을 떠나왔지만 상념의 창고에 꼬깃꼬깃 쑤셔 넣은 수많은 생각, 추억들은 지울 수가 없다. 말할 수가 없는 것도 있다.

 

 세상이 바뀌어 돌아가다 보니 참으로 엉뚱한 방향에서 이 아리랑고개는 부흥하고 있다. 전통민요 아리랑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니 그러하나 참! 아니면 괴나리봇짐 지고 방랑 삼천리 유랑하던 옛길 찾기 운동의 일환에선가.

 나의 고향 우리 집은 바로 이 아리랑고개 밑이었지만, 지금 그곳에는 알 만한 사람도 별로 없고, 보살펴야 할 무덤들만 있다. 선영(先塋)이 있으니 죽기 전에는 고향과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아리랑고갯길을 복원한다기에 허물어진 옛 신작로 길을 가다듬는 줄 알았다. 지금 시골엔 거주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고 굳이 이 아리랑고개를 걸어 넘어 다닐 사람이나 자동차도 별로 없다. 그러하여도, 소달구지마저 제대로 다니지 못해 안달하던 옛 신작로 길을 복원해 놓는다는 것이 동네사람들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문제는, 문화유적 복원이나 옛길 찾기의 타당성 검토나 그 규모에 있었다. 

 아리랑고개라고 이름한 고개가 무수히 많아 우리 동네 뒤의 아리랑고개는 어느 정도의 역사성이 있고 보존가치가 있는가 하고 살펴보았다. 풍수지리적인 입지와 그에 따른 몇몇 전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옛 현(縣)의 소재지 뒷편 산 준령이 물을 마시는 소의 형국이고, 아리랑고개가 물을 마시는 소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목을 자르면 안 되는 것을 잘라버린 일의 시비 곡직의 설화에, 정유재란과 관련된 황석산성이 마주 바라보이는 고개이자 통로이기도 했으니 향토사적인 입장에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옛길임은 분명하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 왜적과의 황석산성 싸움에서 순국한 안의 현감 곽준과 함양 군수 조종도의 충절을 기린 황암사(黃岩祠) 구지(舊趾)가 있는 사당골이 이 아리랑고개 밑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옛날 아리랑고개는 그 아리랑고개다워야 하는데, 이건 왕복 2차선 아스팔트 자동차길에 가드레일까지 설치된 보행자 통로가 따로 있는 대로가 되었으니 호사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리랑고개 정점의 아치형 터널은 무슨 상징적 조형물 같기도 하여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옛길을 살려 전통문화를 이어가자는 것이었지만 본말이 전도된 것이나 아닌지.

 나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문제는 4대조 선영의 축대 바로 밑이 아리랑고갯길이어서 어려운 공정을 거쳐 축대를 보완해야 했던 것인데, 그런 많은 비용까지를 감안한다면 이 아리랑고갯길의 복원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살이에는 소종래를 안다는 것이 불가피하고 소중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내 고향 아리랑고개에는 나 개인적인 정념 말고도 이 지역 사람이면 한 번쯤 챙겨보아야 할 전설이 하나 더 있다. 안의면 황곡리 이문 동네의 갑옷바위 전설인데, 이것은 정유재란 때 의병장 활동을 한 인물의 전설화가 분명하다. '갑옷바위 전설'에 삽화로 끼어든 아리랑 노래는 이 고장 아리랑고개의 '아리랑'이라 할 만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섬나라 오랑캐가 짐승이 되어

     우리 강산 우리 백성 괴롭히누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전설의 갑옷바위가 있는 동네에서, 정유재란 때 왜적과의 격전지 황석산성이 바라다 보이는 중간 지점에 있는 아리랑고개를 두고 이 고장 사람들의 인심은 무심할 수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아리랑'은 여음으로서의 '아리', '아라리'가 있어 우리의 전통민요로서 우뚝 자리잡기도 하지만 '아리랑고개'라는 환경에서 드리워지는 정서가 남달라 문예적 창작물이 자생하였으리라.

 내가 가지고 있는 아리랑고개에 대한 정념! 그것은 미래로 향한 꿈이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되돌아가는 원초에의 회귀이다. 자기 변명으로 굳이 긍정의 일단을 찾는다면 그러한 정념이 나의 오늘을 이끌어 준 추동력이 되어준 것은 아니었겠나 싶기도 하다.     (2015. 8.15. 동인지<길>16호.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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