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어떤 귀향

如岡園 2016. 11. 1. 22:3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면 미래 세대의 태반은 고향의 개념이 막연해질 것이다.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는 말도 있었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立身揚名하여 錦衣還鄕하는 것을 큰 영예로 알아왔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시절 고향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신성한 곳이며, 꼭 가 보아야 하는 운명의 장소이며, 생각만 하여도 우리의 가슴을 격동시키고 눈물짓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땅이다. 그 풍경이나 인정은 언제나 아름다워서, '고향을 떠나지 말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어려서 떠난 고향 늙어서 돌아오니,

    고향말투 그대론데 귀밑머리 다 빠졌네.

    동네 아이 서로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손님은 어디에서 왔냐고 웃으며 묻네." 

                     少小離家老大回  鄕音無改鬢毛衰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    <回鄕偊書> 賀知章


 시의 仙人이라는 李白을 당 현종에게 천거하였다는 賀知章의 이런 <회향우서>가 아니라도 역대 시인들의 귀향 정서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을 보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얼마 만큼 질량감이 있는 것인가를 알게 한다.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을 두르고 돌아앉아서, 산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마을, 복사꽃 살구꽃이 피는 따뜻한 마을을 지나고, 동리 밖 둥구나무 그늘에 모여드는 애들과 이야기하고, 세월 따라 살아가노라면 마지막 돌아가는 곳이 고향'이었다. 


 산업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이런 고향의 정서는 깡그리 망그러져버렸다. 농경을 위해 노동력을 결집하여 일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시로 떠나야 했고, 農者天下大本은 공업화 산업화의 기치 아래 퇴색되어 버렸으니, 농촌으로 대변되던 고향은 설 자리가  없게 된 지 오래되었다.

 현대 문명은 고향을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 학자도 있었지만 고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음 허전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도시에서의 취업이 어려워가고 삶이 각박해지니 귀농을 유도하기도 하고, 또 스스로 귀향을 해 고향을 부활하는 움직임도 없는 바는 아니지만, 버리고 떠난 고향, 그 옛날의 터전을 복원해 제자리로 찾아드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년이라면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며 꿈에서나 찾아갈 고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귀밑머리 하얘지고 어금니마저 다 빠진 늙은이를 알아볼 사람 하나 없는 고향, 어디에서 온 손님이냐고 되묻는 낯선 사람이 살고 있는 고향을 찾아 무엇 하겠는가.

 젊은 시절에는 그래도 귀향의 기회가 많아 고향과의 단절감이 덜하다. 남겨진 부모형제와의 해후가 있었고 피로해진 심신의 치유를 위한 고향산천에의 歸休, 동심을 동경한 각급 동창모임을 위한 귀향으로 가슴이 설레었었다. 이젠 고향에 돌아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닌 고향, 산천은 의구한데 對酌할 인걸이 없는 무심한 고향을 찾아갈 명분은 先塋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어떤 귀향은 심령으로서의 귀향, 곧 영혼의 귀향이라 할 것이다.


 내게 있어 연중 불가피한 두 차례 귀향의 한 번은 여름의 끝자락에 해야 할 선영의 벌초를 위한 것이고, 또 한 번은 겨울의 초엽에 있는 門中 단위의 時祭 참가를 위한 귀향인데 이것이 내 만년의 고정적 귀향이 돼버린 것이다.

 근로와 관습의 굴레를 쉬 벗어나지 못하는 고루한 사고에서 기인된 이 귀향의 명분을 구실로 나는 만년의 귀향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정신적 고향은 물질적 투자의 대상이 되고, 예법에서 도출된 전통 의식은 서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방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내 나름의 저항이기도 하다. 

 그런 귀향의 기회, 지금은 남이 살고 있긴 해도 내가 살던 정든 집이 그대로 남아 있고, 젊은 꿈, 청춘을 구가하던 뒷동산 잔디밭, 추억이 살아 있는 고향이 있어 돌아갈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하는 살아 있는 영혼의 귀향, 나를 키워준 고향, 내 마음 속 고향은 늘 아름다운 환상, 그리운 정으로 도배되어 있다.

 지나간 시대의 어떤 어두운 그림자를 신앙처럼 움켜잡고 짓씹어대는 자학을 나는 싫어한다. 그런 심성을 예술로 심화하여 자가 도취하는 것도 나는 혐오하면서 티없는 영혼이 고향산천을 달리고 있다.

 겉멋으로 세계화가 되고 일일생활권을 보장받은 나라, 先塋이 없다면 고향도 없게 되었다. 언젠가는 이 무덤들도 흔적마저 없어지고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세에서는 자신의 육신마저도 귀향을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뜬금없는 귀향타령은 사치한 마음의 유희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늦은 벌초를 하기 위하여 우리 부부가 전세를 내어 타고 가는 택시의 기사는 노인이 다 된 우리가 벌초를 하러 귀향한 행색이 대단하다 싶었던지, 조상의 무덤을 파다가 火葬을 하여 제가 사는 도시 근교의 납골당에 안치하는 조상섬기기의 逆현상 사례가 많다며 변질되어가는 세상 인심을 통탄한다. 대중목욕탕 신발장 같은 납골함에 유골을 보관하고 해외여행이나 나다니자는 건가.

 어느 집안 할 것 없이 전래한 先塋을 관리하고 기제사와 時祀를 지내는 일이 어려워진 현실에서 그 묘수를 찾아야 할 일이지만 민족정서의 原型의 범주를 하루아침에 크게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상의 무덤이 고향의 존재 가치를 부상하는 계기가 되고 귀향의 구실이 되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졸부 근성에서 비롯되는 과시용 무덤의 치장이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소박하게 다듬어진 고향산천의 무덤을 찾아 귀향을 하고, 살아온 과거를 추억하고 그것을 거울로 삼아 오늘의 삶을 보듬어 간다면 참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연하여, 생을 마감하고 돌아갈 곳을 생각해 본다.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미리 이런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대책도 없으면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종교인이 아닌 범속한 인간의 입장에서 돌아갈 곳, 가고 싶은 곳은 고향땅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육신은 한 줌 재로 변했을지언정 영혼이나마 고향땅에 묻히는 그야말로 영혼의 귀향이 되는 것이다. 무덤을 돌볼 여건이 안 되면 그냥 그대로 버려두어도 된다. 고향에 돌아왔으니까 안심인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거국적 인사라면 단순한 귀향이나 영혼의 귀향에 대한 문제는 사뭇 달라진다. 소박함을 가장하여 고향고향 하다가 번거로운 일만 생기는 것이니 通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지구촌의 시대, 고국이 분단된 현실에서 고향의 한계가 다변화하고 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는 고향, 몸은 떠나와 있어도 마음이 떠나지 못한 고향, 귀향의 상념은 날개를 펴 퍼덕이지만 날 수가 없다. 상상 환상으로서의 귀향에 마음 설렐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유독 고향을 그리워해 만년엔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사랑하며 살겠다던 친구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멀리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 가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귀향은 고사하고 귀국할 여건도 안 되는 입장이다. 뜻이 있다고 해서 길이 있다는 진리는 늙은이에게 있어서는 진리가 아니라 궤변일 수도 있다는 예증이다.

 근대의 끝자락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태반은 '고향을 떠나지 말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고향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의식을 좀처럼 버릴 수 없다.

 '죽었다'는 말을 '돌아갔다'고 표현했으니, 나그네로 이승을 헤매다가 죽으면 저승 곧 본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맞은 것이 아닌가. 

 어떤 형태의 귀향이 되었건 영혼은 고향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2016. 9. 28. <길>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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