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연적(硯滴) 추상(追想)

如岡園 2016. 11. 27. 13:12

          연적(硯滴) 추상(追想)


 연적은 문방사우라 일컬어지는 紙, 筆, 墨, 硯 중 먹과 벼루와 관련하여 벼룻물을 담는 조그만 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단순한 기능 못지 않게 앙증맞게도 묘한 매력이 있는 물건이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모시적삼 안섶 안에 硯滴(연적) 같은 저 젖 좀 보소

    연밥 줄밥 내  따 줄게 담배 씨 만큼만 보여 주소


  58년 전 경북 칠곡이 고향인 모교 국문학 교수가 강의 시간에 그 지역 민요를 예시하여 노동요의 기능과 겨레의 정서를 논하면서 유독 이 구절을 절찬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에로티시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솔직담백한 감성의 표출, 절묘한 표현력에 초점을 맞추어 전래 민요의 시가로서의 문학성을 강조했다고 생각되었는데, 그 때로서는 유독 모성(母性)의 상징과 연적(硯滴)의 대비가 공감되지를 않아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그 후 이 민요를 떠올릴 때마다 자주 연적(硯滴)을 추상(追想)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내게 있어 연적의 추억은 유년시절, 어쩌면 유아기를 벗어난 직후부터 이미 인연이 닿아 있었지 않았나 싶다. 돌잔치 자리에서 실패나 붓을 잡았듯이 연적이 있었다면 연적을 잡지 않았을까 한다.

 조부님이 붓을 들 일이 있을 때마다 어려서부터 나는 연적에 든 물을 벼루에 떨어뜨려 먹을 갈았다. 어린 나에게는 심심찮은 놀이였고 조부님은 조부님대로 귀한 손자에게서 느끼는 기특함이 있어 굳이 내게 먹을 갈게 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 말년에서 일제 침략기, 대한민국 초기를 살다 간 조부님은 특별히 시인 묵객이라거나 초시(初試) 처사(處士) 같은 선비가 아니라 전형적인 농사꾼이셨다. 그러면서도 붓과 먹과 벼루 종이를 가까이 해 <한훤차록(寒暄箚錄)> 같은 실용적 생활상식들을 필사(筆寫) 집록(輯錄)하여 두고 실천하는 민속(民俗)의 생활인이었다. 찾아오는 이웃들에게 부적도 그려주고 사주 궁합, 혼인 단자, 길흉화복의 점괘, 날받이 할 것 없이 온갖 것이 붓으로 쓰이어지고 그려내어진다.

 그런 조부의 그늘에서 아주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암송하고 연적을 노리개 삼아 가지고 놀게 되어 붓과 먹과 벼루는 친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정작 붓으로 글씨를 쓰는 일에는 나는 영 재주가 모자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에게는 서예(書藝)는 고사하고 붓글씨 자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붓에 먹물을 찍어 종이에 들이대고 글을 쓰려고 할 때 느끼는 그 물컹한 감촉에 예쁜 글씨를 기대하기는 고사하고 미리 질겁하고 마는 것이다.

 붓과 종이의 접촉면에 물리적으로 힘을 실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여 붓끝과 종이면 사이의 그 입체적 공간을 운용해야 하는 붓글쓰기의 기본을 터득 못한 응보였으리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등상 상품으로 받은 오동나무 필묵함은 내게 있어 참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상품(賞品)으로 기억되고 있다. 

 통상적 필기구가 붓에서 연필, 만년필, 볼펜, 사인펜으로 다변화하면서 나의 이 붓글씨에 대한 콤플렉스는 좀 가시는 듯했다. 붓글씨는 서예(書藝)로 격상되고 그것이 품위 있는 취미 영역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막상 문방사우(文房四友)에 압도되어 주눅이 든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문제는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지도교수가 개인적으로 그 일을 축하하는 뜻으로 이른바 문방사우 일습(一襲)에 서예에 필요한 각종 다른 도구들까지 곁들여진 고급 필묵함(筆墨函) 한 벌을 선물로 받게 된 데서 충격을 받게 된 것이다. 

 전공영역이 한국고전문학이었으니 연구대상인 고전문학 자료는 판각(板刻) 아니면 붓으로 필사(筆寫)된 것이다. 붓으로 쓴 자료의 홍수 속에서 공부를 해 온 사람이 필묵(筆墨)은 상용되었으리라는 앞선 세대 지도교수의 판단이었겠지만 서예엔 문외한인이었던 나로서는 다만 면구스러울 뿐이었었다. 

 그렇게도 자상하고 부지런하던 조부 밑에서 연적(硯滴)을 노리개 삼아 먹을 갈고, 주사(朱砂)에 침을 발라 부적(符籍)을 그리던 어린 시절, 조금만 붓이라는 필기구에 애착하고 글쓰기를 익혔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그렇다고 하여 나는 서예(書藝)라는 붓글씨의 예술작품(藝術作品)을 도외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공존하며 친화해야 할 입장에 서 있었다. 

 필사된 고전작품을 독해할 필요가 있을 때는 진땀을 빼면서까지 붓이 흘러간 자국 한 획 한 획까지를 읽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예와는 인연이 닿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애시 당초 글씨엔 소질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늘그막에 접어들면서는 서예를 하는 사람이 부럽고 서예학원에라도 다녀볼까 하였으나 그것마저 부질없는 호사라고 생각되어 접어버렸다. 대신, 서재의 시렁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얹혀 있는 두 벌의 필묵함을 뒤적거려 어릴 적부터 정들여왔던 그 연적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을 추상할 수 있는 연적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애매한 붓글씨교본을 핀잔하기도 했다.

 도자기의 고장 이천으로 이주해 와서 살면서 도자기축제가 열릴 때마다 내 눈길을 끈 것도 연적(硯滴)이다. 골동품으로서의 도자기가 아니라 요즘의 도자공예가들에 의해 빚어진 도예품(陶藝品)이지만 연적은 문방(文房)과 관련된 기능성 자기(瓷器)라서 정겹다.

 그런 연적에 물을 담아 먹을 갈고 붓글씨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즐거울 것인가. 마음에 드는 연적이 있으면 공연히 가지고 싶어진다. 예쁜 것이 있으면 그런 연적을 사서 두었다가 서예(書藝)하는 친구에게 선물하여 대리(代理) 만족(滿足)이라도 하고 싶다.

 먹물을 사서 붓글씨를 쓰는 세상이라 연적 같은 것은 필요가 없어 수요가 적으니 새로이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도요(陶窯) 제품으로서의 연적의 수량도 줄어 허전함을 느낀다. 

 붓, 먹, 벼루, 종이 이렇게 문방사우(文房四友)로 표상되던 문방구점(文房具店)은 문구백화점(文具百貨店)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지만 정작 그런 것들을 구입하려면 인사동 필방(筆房) 같은 데를 찾아야 하는 형편으로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다.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작성하고 화면을 긁어내려 영상을 전송하는 디지털 시대, 그래도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 있어 그것을 추상(追想)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는다.       

                                                                                (2016. 9. 28. 수필 동인지<길>18호.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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