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더불어 나는 격동에 찬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한 무리의 영상들, 판사나 목사가 된, 농부가 되어 기억 속에서 라틴어의 싯귀를 뿌리며 경작하는, 아니면 은행원이 되어 모험을 갈구하던 젊은 날의 웅대한 꿈을 장부의 차변과 대변 속으로 녹아 없애 버린 친구들, 머릿속에는 반항과 고집, 뜨거운 동경과 설렘으로 꽉 차 있던 소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차례차례 더듬어 보노라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재회를 할 수 있으리라. 삶의 의욕으로 충만하여 즐거우면서도 남모르는 비밀과 투시할 수 없는 미지의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번민하던, 온통 분별 없고 결단성 없던 열 세 살짜리, 아니면 열 다섯 살짜리의 내 자신과.
나를 에워싼 한 무리의 친구들은 죽음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걷잡을 수 없는 비약의 발걸음으로 내 인생 속으로 뛰어들어온 젊음은 4년 간의 세계 대전의 광풍과 화염 속에서 갈가리 찢어지고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따금 나는 모든 친구들 중에서 아직도 목숨을 붙이고 있는 자는 내 자신 뿐인 듯 느껴질 때가 있다.
마르라는 친구는 프랑컨 주 뢰엔의 아늑한 숲 속에서 태어난 산지기 아들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상 물과 숲의 입김이 서리고 송진과 건초의 향내가 풍기고 있었다.
그는 대담하고 꾀가 많고 장난을 좋아하며, 야심이 만만하고, 배우는 데 억척스럽고, 게다가 괴짜이면서 재치가 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연두빛 여린 가지로 모자를 엮어서는 닭털 장식을 하거나 푸른 반점 있는 어치의 흰 날개를 꽂아 쓰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또 이미 열 네 살 때 아버지를 좇아 사냥을 가서 목에 숨어 있다가 숫노루 한 마리를 쏘아 죽인 적도 있었다. 그는 새들이 깃을 치는 장소를 찾아내어 둥지에서 새알을 꺼내서는 바늘로 알들의 끝을 찔러 알맹이를 끄집어내었다. 그리고는 속이 빈 알을 수집가들에 팔아 먹었다.
한 번은 화창하게 맑은 어느 가을날, 우리는 돌을 던지고 장대를 치면서 우람한 나무에서 밤을 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푸른빛 금속 첨탑이 솟아 있던 잘레크 성의 아름다운 모습이 언덕에서 굽어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밤톨로 그 친구의 무릎뼈를 겨누어 세차게 맞혔다. 그러자 그는 미친 듯이 열이 올라서 사냥꾼처럼 손쉽게 언제라도 쥐게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칼을 뽑아 날을 세워 들고는 나를 쫓아 쏜살같이 달려왔다.
나는 그에 앞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다가 느닷없이 우뚝 서버렸다. 그리고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맹목적으로 뒤따라오던 그는 날카로운 칼로 나를 찔러 혈관을 건드렸던 것이다. 짧은 바지에서는 피의 얼룩이 흠씬 배어 나왔다. 친구들이 나를 가까이 있던 성으로 끌고 갔고, 그 곳에 있는 양치기가 상처를 세척하고 지혈액을 두드려 바르며 고약을 붙여주었었다.
그 친구 역시 전쟁중 출정을 했고, 세 번이나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알프레드는 어느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에게는 예쁘고 날씬한 누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누이를 우리의 라틴어 선생님이 사랑하고 있었다. 겨울날 그 선생님은 이 사랑스러운 처녀와 얼음판에서 멋있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여름날 오후면 나는 외딴 숲 계곡에서 곧잘 이 연인들과 부딪쳤었다.
알프레드는 겁이 많고 추위를 잘 탔고 추워지면 뺨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성적이 불량한 학생이었다. 언제든지 정신은 다른 데 가 있고, 수업 과목에 취미를 못 부쳤다. 다만 피아노만은 묘하게 힘찬 텃치로 조금도 거침없이 거의 예술적으로 연주를 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할 줄 몰랐다. 여름이 와도 우리와 수영이나 미역감으러 잘레 강으로 간 적이 없었다. 언젠가 나는 갈대 벌에서 노란 부리의 어린 새가 고물고물 들어찬 개개비의 예쁜 둥지를 보여 준 적이 있다. 내게는 그토록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그 물건이 그에겐 다만 지루할 뿐이었다. 그는 에뛰드라든가 작곡, 트레몰로, 급속 연속음 같은 얘기나 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우리가 모두 졸업을 해 학교를 떠난 뒤 어느 날, 나는 프랑컨의 클라인슈타트의 장터를 걸어가다가 그를 만났다. 그때 그는 다보스의 폐결핵 요앙소 안에서의 묘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마 그는 그곳에서 알게 된 어느 조그만 러시아 계집애한테 홀딱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읽어서 달아빠진 편지 틈서리에서 그는 한 가닥 머리칼을 끄집어내었다. 머리칼은 옻칠처럼 새까맣게 반짝이고 있었다.
일년 뒤 나는 신문에 그의 부고(訃告)가 난 것을 읽었다. 그의 나이 미처 열 아홉도 되기 전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마일게겐트 태생의 어느 소농(小農)의 아들이 있었다. 유난히 눈자위가 좁고 음침하게 쏘는 듯한 시선을 한 외고집장이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성직자, 이를테면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들은 툭하면 욕설이나 입에 담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시간만 나면 소형 피스톨을 들고 산울타리를 따라다니거나 숲가를 돌아다니며 새를 쏘아 잡았다.
그는 달리기와 기어오르기에는 선수였다. 한번은 알을 품은 부엉이의 둥지를 망쳐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부엉이 한 쌍이 무시무시하게 울부짖어 대면서 둥지 도둑이 앉아 있는 소나무 수관(樹冠) 주변을 뱅뱅 맴도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돌멩이를 던져 암놈의 머리통을 으깨어 버렸다. 지금은 돌이켜 생각만 해도 혐오감이 일지만 그때 우리들은 어쩔 줄 모르게 좋아하며 이런 장난을 쳤었다.
언젠가 우리는 포도주 창고에서 토기 항아리를 훔쳐서 조약돌을 잔뜩 채워 넣고 검정 화약 가루를 덮어 붓고는 벌어진 틈마다 물 속에서 폭발하는 도화색(導火索)을 찔러 넣어서 아구리에 코르크 마개를 했다. 그리고는 도화색이 달려 있는 이 용기들을 잔잔한 강물 속으로 던졌다. 하나하나의 용기들은 폭발을 했고, 토막난 물고기의 시체들이 강의 표면으로 둥둥 떠다녔다. 그때 우리는 손가락으로 신나게 휙휙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 친구는 곧 학교를 집어치워 버렸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수학 과목에서 번번이 거듭 낙제점을 받았고, 학교 질서에 적응하려 들지를 않았던 것이다.
훗날 그는 프랑스의 이역으로 도망을 쳤다가 폭도 압트 델 크림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전사를 했다.
프리츠라는 이름의 또 다른 친구는 흡사 할아버지 같은 얼굴 모습을 한 홀쭉하고 융통성 없는 소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수도원 부속 양조장이었던 어느 양조장에서 기사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양조장은 시내에서 20 분 쯤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언덕의 연변으로 넓고 하얀 길이 숲과 포도원 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프리츠는 책보따리를 어깨에 바짝 둘러메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이 길을 걸어다녔다. 그는 식물 선생님 한테 표본용 꽃의 대부분을 갖다 바쳤다. 그가 다니던 큰길은 언덕을 타고 올라와 수풀 사이로 들어서기까지는 초원으로 뒤덮인 습하고 널찍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잘레강에서 멱을 감다가 익사했다. 밀물이 몰려와 강물이 초원을 흙탕의 물결로 뒤덮으며 흐르고 있었다. 햇빛이 화사하게 쏟아지는 넓고 깊은 웅덩이 속에서 우리는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그가 물 속으로 잠기더니 손을 위로 허위적거리며 불쑥 솟았다가는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솟았지만 처음처럼 높이 솟아오르지는 않았다. 우리는 미친듯이 살려 달라고 고함을 지르며 흙탕물 속으로 잠수를 해 보았지만 그런 수고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몇 시간 뒤, 그의 시체는 갈고리로 강 바닥을 수색하던 어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불과 열 다섯 살의 나이에 그는 엄숙한 행렬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립 묘지에 묻혔다. 그 장례식에서 나는 촛불을 켜들고 있었다.
칼은 눈에 띄게 단아한 귀공자 같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와 나의 부모들은 날씨 좋은 일요일이면 곧잘 그 지방 특유의 포도주를 파는 프랑컨의 어느 마을 주막을 찾아 시골로 가곤 했다. 학교 과목이라면 하나같이 냉소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슬프고 커다란 눈, 그의 눈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보도 아니고 다만 지독히 골똘한 공상이 많고 비사교적이었을 뿐이었는데도 그는 이미 배운 과목을 두 번이나 거듭했다. 여자처럼 조용한 소년이었으면서도 그는 각종 인디언 책들과 화살, 활, 창, 방패, 투석용 가죽끈, 던지는 도끼들을 수집해 갖고 있어서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기는 그것들이야말로 그의 어린 가슴에 강한 모험욕과 뜨거운 공상의 불길을 붙여 준 촉매체였었다.
미처 극진한 놀이 동무가 되지도 못한 채로 법원 관리인 그의 부친이 다른 시로 전근을 하게 되어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칼은 일찌감치 학업을 끝마치고 법원의 중급 관리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따금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가 쓴 단편 소설이 실린 것을 읽었다. 대체로 유머와 예리한 관찰력과 휴머니즘이 넘치는 단편들이었다. 바이에른의 농부, 행상, 비천한 수공업자들이 그의 소설의 주인공이었고, 그들이 겪는 궁핍한 모함, 간계가 그의 소재였다.
내게는 칼의 존재가 잊혀지고 기억 속에서 씻은듯이 사그라져버린 전쟁 통에, 나는 느닷없이 그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고 즉각 답장을 쓰며 책과 초콜릿, 담배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는 답장을 받지 못했다.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그의 글도 다시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났다가는 곧바로 잠적해 버렸다. 전쟁 중 참호의 대폭파 중에 실종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의 운명을 알 수가 없다. 필시 그의 종말은 처참했으리라. 아무 생각없이 수학이나 대수 문제를 풀 때에 슬픔과 냉소를 머금고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들과 맺은 우정이 이후의 내 인생에까지 살아 이어진 친구는 내게 한 사람도 없었다. 학창시절이 흘러간 뒤의 인생행로에서 나는 아무와도 재회를 한 적이 없다. 대부분의 친구가 피의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하기야 죽음이란 이미 그때 교실 의자 위로 그들 사이에 내려와 앉아 있었다. 그들이 배운 라틴어는 장송전례(葬送典禮)처럼 울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車京雅 譯)
# 안톤 슈낙의 산문적 특성은 리듬이 있는 화려한 문체에 있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작가의 관찰이 아름다운 문체의 저력이다. 인생을 바라다보는 작가의 달관된 시선이 읽는 이에게 더욱 공감을 준다. 긍정과 부정, 기쁨과 슬픔, 밝음과 어둠의 양면성을 지닌 세계에서 슈낙은 긍정의 편에 서서 부정의 면을 모나지 않게 투시해 준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생을 사랑하는 자세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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