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젊은날의 비망록에서(18)

如岡園 2020. 3. 1. 22:19

     1963년도 3월 병영일기 중에서

 

          1963年 3月 1日 金曜日 맑음

 44回 3.1節 !

 飛行團 自體로 간략한 記念式을 하고, 오후부터 外出이 있었다.

 102 派入部隊가 오늘부터 우리 大隊 內務班으로 編入되어 우리 內務班에도 4名의 이사짐을 옮겨다 놓았다. 날씨가 유난히도 따뜻해서 화창한 봄기운을 여지없이 들어내 놓았고 連3일간의 休務를 앞둔 營內는 그지없이 화평하기만 했다.

 1時에 外出證을 받아 見性寺로 나갔다. 放學동안 巨濟로 가고 없었던 大仁이를 처음 만나보니 몇 달 만에나 만나는 듯. 同鄕 後進 斗七 君이 敎育大에 合格되어 며칠 間 見性寺의 食客이 하나 더 늘어 오히려 내가 더 민망스럽다. 어디 家庭敎師 자리라도 求해주고 싶었지만 숫배기 시골뜨기를 달갑게 받아줄 곳이 있을런지! 그를 對할 때마다 6年 前 冊보따리 하나를 끼고 大邱 땅을 처음으로 밟았던 自畵像을 보는 것 같아 자못 感慨가 無量했다.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으며 어느 정도 人生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自負할 수 있을 것인가! 셋이서 아카데미에 가서 <기병대>를 관람.

 곧장 영내에서는 뛰어나오고만 싶던 것도 이렇게 나와서 보면 이렇게 덤덤한 것이 되고 만다.

 

          1963年 3月 2日 土曜日 개임

 어제 그렇게 화창하던 날씨가 아침부터 구름이 끼고 바람이 일어 자못 스산한 느낌이다. 아침 먹고 푹 마음 놓고 쉬어볼 겨를도 없이 11時에 歸營했다.

 우리 내무반 옆 부대 내무반과 下士官室을 교체키로 되어 있어 이사짐 날라다 주기에 분주하다. 고참 下士官들의 시중을 하나하나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즐겁고 마음내켜서 하는 일은 아니면서도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무진장한 시간이 남을수록 사람은 게을러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함에 따라 놀랄 만큼 生活의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을 할 수도 있다.

 어쩐지 冊을 들여다 보기도 싫었고 장기나 바둑이나 화투나 당구에도 시간을 할애하기도 싫었다. 오락 방면의 無취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정신 써서 배우고 싶지도 않았고, 무슨 큰 必然性도 發見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지극히 單調한 人生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까. 말하자면 폭 좁고 변통성 없는 그런 人生을 말이다. 아무튼 이것도 天性일 바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할 것이다. 

 빨래터도 복잡하지 않고 난로에 더운 물을 얼마든지 자유스레 쓸 수 있다는 혜택에서 그동안 밀려왔던 빨래를 세 차레에 걸쳐 말끔히 해치웠다. 그것도 피치 못할 兵營生活에서의 自身의 일일진대 그것을 해치운 뒤의 느낌이란 더없이 속시원하고 마음 홀가분한 것이다.

 

          1963年 3月 3日 日曜日 개임 

 大部分 外出을 나가고 없는 조용한 내무반이 좋다. 이따금 전달 걸려 오는 사역병 차출이나 內務班에서 쓸 물을 긷는 일은 一等兵 들의 所任이니 上等兵인 나로서는 그렇게 마음 쓸 것도 아니라서 休務 날은 얼마든지 自由스러울 수가 있다.

 放任된 채로의 기나긴 休息은 차라리 어떤 종류의 권태감을 일으킨다. 무진장한 시간을 보내는 消日의 方法으로 누구는 撞球場에서 終日을 들어백였고, 어떤 이는 장기에 바둑에 눈을 팔고 있지만 내게는 이렇다 할 곳에 마음이 가지지를 않는다. 이러한 상항은 人間을 더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素因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각마저 메말라 간 채 권태스런 시간을 보내면 나도 모르게 보잘 것 없고 無價値한 人間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좀 더 豊富한 感情으로 自身의 人生을 기름지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 한 장 한다는 조그만 일에도 무관심한다는 事實은 그것이 發展하여 어느덧 不誠實한 人間을 만들고 마는 結果를 가져오고 말기 때문이다. 放任한 마음으로 아무렇게 살아가는, 되는대로의 삶을 지양하고 어느 곳에든지 熱中할 마음의 執着点을 찾아나가자.

 200 餘 名 大隊員의 어느 누구 하나의 잘못에도 瞬間的으로 雰圍氣가 변해가는 兵營 生活은 몸서리쳐지게 귀찮은 生活이다. 完全히 自身을 妄却한 채로 끄을려 살아가야 하고 어떠한 强壓에도 不評을 말해서는 안된다.

 

          1963年 3月 4日 月曜日 맑음

 3日 동안 지루하리 만큼 길었던 休務가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한 週日이 시작되어도 생신한 맛은 없다. 습관화 된 安逸은 차라리 작은 일에도 성가신 느낌만 들 뿐 도저히 일을 할 意慾이 나지를 않는다. 그런대로 오늘도 Engine 한 대를 시운전 하고 남은 시간은 줄곧 X下士 와 0中士의 私事에 努力을 제공해야만 했다.

 自發的인 服從心이 아닌 마지못해 해나가는 일은 역겨웁기만 했고 남의 性格的인 面의 참견이나 핀잔은 잔뜩 기분만 잡쳐놓곤 한다. 그럴 때마다 분화구 없는 울분이 內面에서 끓어올랐고 어떤 말못할 反抗心이 끓어오르곤 했다. 그런 것을 못참아 나가고 心理的으로 反撥을 한다는 것은 요령부득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결국 그러한 心的 갈등은 건전한 발전을 가겨오기 보담 어떤 정신적 파멸감을 가져 오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미숙한 처세법일지도 모르고보면 새로운 하나의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경환에게서 편지가 왔다. 淑子가 高等學校에 進學을 하게 되었고, 경환이 저는 4學年에서 2等을 했는데 내년에는 꼭 1등을 해서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기특한 마음이다. 따지고 보면 肉親처럼 더 가까운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고,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爲해 마음을 오로지 경주해야 할 것이다.

 大學 後進 相淪 君을 우연히도 基地食堂에서 만났다. 갖 배속을 온 신병티가 가시지 않은 그의 모습을 대할 때 일변 반갑기도 했지만 어떤 가슴쓰린 회한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서 열패한 人間 모습을 읽을 수 있었고, 그를 通해 認識된 自身의 처절한 現實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의 성격에 애브노말한 점을 예부터 發見했지만 그러한 선입관에서 오는 편견으로 그를 허술히 對하고 어엽잖게 생각하는 마음은 결코 좋다고는 할 수가 없다. 最大限의 노력을 기울여 좀 더 따뜻이 對할 수 있는 아량이 요청되기도 하지만 바쁜 군대의 규범에 쫓겨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도 발견하지 못하는 自身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1963年 3月 5日 火曜日 맑음

 3月의 한낮! 엊그제 겨울 기분에 몸을 웅크렸던 것 같은데 이럴 때 같으면 정녕 겨울 내의가 거치장스러울 정도로 날씨가 따뜻하다. 파랗게 물 오른 수양버들 가지에 새움이 터오고 포스근한 땅속엔 모든 生靈들이 冬眠에서 깨어나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실려 끝없이 흘러가는 人生이란 정말 묘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사관실 당번이 끝났다. 22時 20分, 同僚들의 코고는 소리가 잠에의 유혹을 던져준다. 그냥 이대로 피곤한채로 골아떨어지기엔 오늘 하루의 얄궂은 일과가 던져주는 의미가 너무나 컸던 탓인가! 

 Engine Shop에서나 內務班에서나 무척이나 바빴고 과중한 勞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내 人生에 무엇을 프라스 해 주는 것이냐.

 공연한 자기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올랐지만 그것마저 결코 無意味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1963年 3月 6日 水曜日 맑음

 오늘부터 13日까지 1 週日間, 空本으로부터의 綜合檢閱이 實施된다. 이번 檢閱은 作業場에 뿐만 아니라 內務生活 全般에 걸친 철저한 검열로서 內務班에서나 作業場에서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장비를 정돈하고 지상안전에 對備해서 말끔하게 청소를 해야하고, 上部로부터 지시하는 제반 사항을 철저히 암기 혹은 이행해야 하니 평소의 몇 배로 軍隊生活이 고되게 된다. 버릇처럼 뇌까리는 그 싫증날 敎育, 그리고 指揮 監督官 급들로부터의 强壓이 말할 수 없이 성가시고 백여나기가 어렵다.

 지금까지의 軍隊生活에서 스스로 즐겨서 한 일이 없고, 軍隊生活의 眞價를 發見하지 못한 自身이고 보니 모든 일에 있어서 재미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런 하기 싫은 生活을 억지로 해치워야 하는 괴로움, 그리고 강제된 노역, 이러한 데서 生活相의 한 悲劇이 있고 정신적 갈등이 싹트는 것이다. 모든 불안한 마음,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해소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생활의 反逆兒로서 고립된 상태에서 정신박약 증상을 면하지 못할진대 나는 여기에 대한 하나의 올바른 생활태도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963年 3月 9日 土曜日 흐림

 임중사는 오늘부터 休暇고 Run-up할 Engine은 없으니 그동안 바쁜일에 시달려 오던 우리들은 오랫만의 自由스러운 休息에 어깨춤이라도 출 듯 즐거웠다. 外出을 앞둔 土曜日의 午前이란 아지 못할 期待 속에 행복감이 가득 차 마냥 기쁘기만 한 시간이다.

 날씨가 흐리다. 그래서인지 外出 기분이 한풀 꺾였지만 크게 탓할 것은 못된다. 철 그른 눈송이에 옹그라드는 어깨가 그지없이 초라했어도 그것은 차라리 못내 버리고 떠나는 겨울의 발악적인 미련이라고 해 두자.

 오래 消息이 두절된 公山 守永이를 찾아갈가 했으나 새침한 기후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東城路 金辯護士 집에 가서 애들과 몇 시간 앉아 놀다가 見性寺로 가려고 일어섰다. 저녁준비가 다 되었는데 갈려느냐고 굳이 말리는 것을 굳이 뿌리치며 나왔던 것은 나의 엉뚱한 自尊心이나 불필요한 淸貧이었던지도 모른다. 아무튼 弱者의 입장에서 빌이를 붙는 것 같은 비굴한 꼴을 보이기가 싫었고 거치장스러운 不請客이 되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宅을 자주 訪問하는 理由는 과연 어느 점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따진다면 얼핏 또렷한 해답이 던져지지를 않는다. 그것은 아마 과거를 회상하는 애띤 미련일 수도 있겠고, 富貴에 대한 羨望일 수도 있고, 나를 좋아하는 純眞한 少女에 向하는 아지못할 憧憬일 수도 있다. 그런 錯雜한 感情에 말려 들어가면 갈수록 그것이 무슨 當然처럼 느껴져 自己本位의 思考方式으로 모든 行動을 끌어 나가는 것이니 구태어 세심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한 주일 동안을 영내에 갇혀 있다가 休務 날을 당하여 外出을 나왔으니  民間社會의 人情이 그리워 그러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1963年 3月 10日 日曜日 흐림

 여기 견성암 寮舍채. 방 속에 들여백여 있으려니, 병사에겐 황금같은 주말 외출이 너무나 아깝고 따분하다.

 흐린 날씨에 앞산에 하얗게 쌓인 봄눈이 살푸녕스러워도 어디든 쏘다녀 보아야만 외출한 기분이 날 것 같기에 大仁이를 부추겨 거리로 나왔다.

 아직도 겨울 오바를 버리지 못하고 웅숭그린 市民들의 모습에 새삼스런 겨울을 느꼈지만 그런대로 활발한 삶이 거기 있었다.

 군복을 입은 하나의 초라한 士兵으로서 社會 사람들을 對한다는 데 어떤 뒤떨어질 것 같은 劣等感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언제까지나 그런 느낌으로 스스로를 괴롭힐 必要는 없다.

 劇場에라도 갔으면 싶었지만 마땅한 프로도 없었고 해서 신천동 이모宅을 찾아갔다.

 "오빠! 나 發令받았어!" 하는, 올해 사범학교를 나온 仁順이의 歡聲에 가까운 외침에 가슴 뭉클한 感懷를 느꼈다.

 가난한 가정에서 가까스로 학교를 졸업하고 社會에 일자리를 구해 발을 디딜 행운을 얻었을 때 어린 가슴에 깃든 환희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할 때의 그런 감회였던 것이다.

 남의 기쁨을 진정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 데에 참다운 人情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한줄기 피를 같이하는 男妹의 일이고 보면 무한정에 가까운 감동 그것인 것이다.         

 

 

  57년전 3월 초의 병영일기 일부를 여기에 옮겨 自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