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소설 속의 진취적 여성상

如岡園 2006. 8. 4. 00:06

 한국의 옛날 소설에서 여주인공은 흔히, 이상적인 미모와 교양을 가지고, 효행과 정절이 곧으며, 인내와 순종을 미덕으로 알고, 불평없이 한 남자를 지성껏 섬기는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춘향이나 심청이 같은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고소설 속의 여인상이라 하면 , 애련한 면모를 가지고 수집어하고 온순하고 운명에 순종하는 것으로만 생각되기 쉽지만 <이춘풍전>을 비롯한 몇몇 고소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여성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오히려 남성 세계를 압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춘풍전>에서의 춘풍의 아내는 무능한 남편을 징치 교화하거나 출세시켜 주는 진취적 여성입니다.

 이 소설은 조선시대, 김씨라는 기발한 여성을 내세워 허랑방탕한 쾌남아를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사랑방에서 호령만 하던 남성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일방, 규방의 부녀자도 능히 남자에 대체되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여성의 자신감을 과시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소설이 순간적 흥취를 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관과 시대적 요청에 응할 수 있는 실천적 의욕을 인식시키는 힘도 크다고 보면 <이춘풍전>은 그 시대의 여성독자에게 참신한 흥미를 던져 주고 신시대의 기운과 융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뜻에서도 한 번쯤 소개할 만한 작품입니다.

 

 서울 다락골에 사는 이춘풍은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호강으로 지내다가 부모가 돌아가자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됩니다. 이 지경이 되자 부인 김씨는 춘풍에게, 집안 일 전부를 자기에게 맡기고 가장인 춘풍은 어떠한 돈이 생기더라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는, 밤낮으로 길쌈과 바느질을 하여 5년 동안에 수천금의 돈을 모읍니다. 그래도 춘풍의 방탕한 성품은 고칠 수 없어, 매일 술에 취해 있는데다가 이번에는 호조 돈 수천냥까지 차용하여 평양으로 장사를 떠났으나 평양기생 추월이의 계획적인 교태와 아양에 빠져 장사 밑천을 모두 날리고 추월이네 집 하인 신세가 되어 마루 밑에서 개와 함께 지내는 처지가 됩니다. 춘풍의 처 김씨는 서울에서 이 소식을 듣고 이를 갈며 분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던 중, 마침  뒷집의 김 참판이 평양 감사로 부임해 간다는 것을 알고 김 참판의 대부인과 사귀어 신망을 얻은 후에 감사를 호위하는 비장이라는 벼슬을 얻어 남장 차림으로 감사 행렬을 따라 평양에 당도합니다. 춘풍의 아내는 감사의 신임을 받아 회계를 담당하는 비장으로서 추월의 집에 행차하니, 3,4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남편 춘풍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고, 기생 추월은 남장 차림인 미모의 회계 비장을 호리려고 영접이 극진합니다. 추월의 행위에 복수심이 끓어오른 춘풍의 처는 수일 후에 사령을 시켜 우선 남편 춘풍을 잡아들여 호조돈을 빌려 주색에 탕진한 죄를 물어 문책하고, 또한 추월을 잡아들여 형틀에 매어 태질을 하여 춘풍에게서 뺏은 호조돈 전부와 5천냥의 거액을 10일 이내에 이춘풍에게 돌려 줄 것을 자백받고 춘풍에게는 자기는 일이 있어 먼저 상경할 것이니 추월에게서 그 돈을 받아 반드시 비장인 자기 집을 한 번 방문 하라는 분부를 내립니다. 한편으로, 춘풍의 처는 감사에게 자기의 목적을 완수했음을 고하여 비장의 직책을 사임하고 귀가할 것을 허락받습니다. 춘풍의 처가 상경하여 비장차림의 남복을 벗어버리고 옛모습으로 돌아와 춘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기의 아내가 비장으로 변장하여 구제해 준 줄은 꿈에도 모르는 평양의 춘풍은 기생 추월을 성화같이 재촉하여 5천냥의 거금을 받아 상경 귀가하여서는 아내 김씨 앞에 득의만만하게, 장사를 잘하여 이렇게 돈을 많이 벌기라도 한 듯 거드럼을 피우기만 합니다. 밥상을 차려 올렸으나 음식 투정을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고, 평양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하는 춘풍을 보다 못한 아내 김씨는, 어두울 무렵에 남편 몰래 밖으로 나가 옛날 그 비장의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담뱃대를 비껴 물고 큰기침까지 하면서 대문으로 들어서며, "춘풍아 너 왔느냐." 하니 춘풍은 평양에서 자기를 구제해 준 바로 그 비장이라, 혼비백산하여 버선발로 뛰어 나와 맞이해 드립니다. 비장으로 변장한 김씨는 일부러 춘풍이 평양에서 추월에게 돈을 탕진당한 일이며 추월의 하인노릇 하던 때를 상기시키면서 농담과 충고를 하니 춘풍은 행여 부엌에서 자기 처가 듣고 있지나 않나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술까지 마시면서 늦게까지 춘풍과 이야기를 나누던 비장차림의 아내는 남복을 벗고 본연의 아내 모습으로 춘풍 앞에 나타나 보이니, 춘풍은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회고담에 밤을 새웠고, 그 후 춘풍은 주색잡기를 멀리 하고 생활에 전념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김씨는 인내와 굴종을 여성의 최고 미덕으로 보지 않고 의연히 여자로서, 방일한 남편을 달래기도 하고 충고도 하면서 기울어 가는 가세를 바로잡고 주색에 빠져 허망한 망상에 사로잡힌 남편의 어리석은 꿈을 깨우기 위해 손수 팔을 걷고 사회의 표면에 등장하는 새로운 타입의 열녀입니다.

 서구에서의 노라는 인형의 집을 탈출함으로써 여성 해방의 선구가 되었으나 춘풍의 아내 김씨는 자신을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 가면서 근본적인 개조를 시도함으로써 가정을 지킨, 한국적인 여성의 해방자입니다. 

 

                                                      김  재  환 (KBS 여성 스튜디오 방송 출연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