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에서 기차로 길림 교화 안도를 거쳐 밤새도록 달려 연길에 도착한 것은 1993년 7월 19일 아침 6시였다. 장장 10시간이 넘어 걸리는 먼 기찻길이었다.
연길에 도착하니 대뜸 눈에 띄는 우리말 간판, '연길에 오시니 반가워요'가 정말 반가웠다. 중국땅에 존재하는 우리말 우리글에 콧잔등이 시큰했다. 이 곳이 곧바로 1952년 9월 3일에 설치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 180만 중 80만명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고, 길림성 면적의 4분의 1이며 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우리 민족이라니 이 곳 연변이야말로 남의 나라이지만 우리 민족의 터전이다.
식민시대의 국경은 국제 정치적 상황에서의 국경이었지만 지금의 국경은 문화와 민족 중심의 국경이란 인식이 연길에서 느낀 첫 인상일 정도로 연길 용정은 우리 한민족의 무대였다.
백산 호텔에 큰짐을 보관하고 조선족이 경영하는 연하촌식당에서 오랜만에 韓食의 진미를 맛보았다. 1주일 가까이 느끼한 중국음식에 곤혹을 치렀던 일행 모두가 열무김치 된장국 콩나물 흰쌀밥을 게눈 감추듯 챙겨 먹고 곧장 백두산 일정을 서둘렀다.
20인승 전용차로 연길을 출발한 지 10분 거리 용정으로 가던 중 연변대학 교수라는 젊은 여자 안내원은 해란강 일송정을 지나면서 당당한 어조로 자랑한다. 지금은 저렇지만 옛날 해란강은 수량이 많고 넓어 배로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강, 그 강에 대한 전설까지 이야기 해 주었다.
해란강을 사이에 두고 강안 양쪽에 두 마을이 오붓하게 살았단다. 그런데 악마가 나타나 양식을 도난하여 걱정을 하던 중 해(海)라는 용감한 총각이 악마의 목을 베었지만 땅에 떨어졌다간 붙고 또 베어도 붙곤 하여 좀체로 죽이기가 어려웠더랬는데 란(蘭)이라는 현명한 처녀가 치마폭에 재를 담아와 해(海)라는 총각이 벤 악마의 목에다가 뿌려 죽게 만들었다고 하여 해란강(海蘭江)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용정을 지난 비포장길 차창 너머로 일송정이 바라보이자 안내자는 재치 있게 <선구자>를 선창한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지친 꿈이 깊었나 // 용주사 저녁종이 이암산에 울릴 때 /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일행은 이 노래 가사의 현장에서 해란강 일송정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목청껏 노래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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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달리던 선구자의 현장은 용정에서 화룡 부흥을 지난 청산리 고개길이었다. 지금은 무심한 산새만 우짖는 한적한 이 고갯길, 청산리 싸움터.
3 .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본국으로부터 망명해 오는 청년들이 증가하자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은 대부대 편성이 가능해졌다. 대량의 독립군 부대가 일본의 눈에 띄는 것을 피하고 실력을 기르기 위하여 그 해 9월 20일 이범석을 단장으로 여행단을 편성, 백두산으로 가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협공작전이 있어 독립군은 백두산으로 이동할 계획을 포기하고 10월 16일 김좌진 장군을 총사령으로 한 전투단을 조직하여 18일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삼림 속 유리한 지형을 잡아 잠복하고 있었다. 청산리를 포위한 일본 기병대가 백운평 삼림 속으로 들어섰을 때 독립군은 일제이 사격을 가하여 적을 섬멸했고 이어 천수평 마을 마록청 고지의 전투 등 이틀밤 이틀낮을 싸워 3천 3백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사상자를 내게 한 역사적 사실이 청산리 싸움이다.
그 엄청난 역사적 사실의 현장인 청산리를 목도하면서 안내자에게 물었더니 자기가 아는 80대 후반의 노인의 말을 들은 바에 의하면 죽은 왜놈의 머리를 잘라 중국 마차로 3대를 실어 용정을 지나가는 것을 어린 시절에 보았다고 하니 가히 망국 10년의 원한에 불탄 독립군 전사들이 이역 만주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백두산을 둘러보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송강에서 조선족이 경영하는, 간판도 우리말인 '충남식당'에서 그 식당의 특미 개고기로 식사를 하였다. 부엌의 무쇠솥에 불을 때어 삶은 개고기에 하얀 쌀밥, 어쩌면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어린시절 고향의 풍경을 어찌도 그렇게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지! 오늘날 이렇게도 변해버린 한반도의, 전통을 잃어버린 우리 문화의 현주소가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용정중학교 윤동주의 시비 앞에 섰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육사처럼 투사도 아니지만 일본 立敎대학 및 同志社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43년 여름방학 귀국 직전 독립운동가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이 곳 출신 윤동주의 시비문(詩碑文)을 접하면서 일제시대 용정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되새겼다.
용두레 우물터 역시 용정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란 한자말과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란 우리말 글자가 새겨진 준수한 표지석 옆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1886년 정서라는 사람이 밭갈이를 하다가 바윗돌이 있어 그 바윗돌을 치웠더니 우물이 있어 물맛이 좋았단다. 용두레로 물을 길었다고 하여 '용두레 우물'이라 하였고 용정(龍井)이란 지명도 이 우물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1870년대 이후 3년에 걸쳐 조선에서는 한재가 겹쳐 이재민이 간도로 이주했단다. 육도해와 해란강이 만나는 곳에 쑥대를 얽어 초막을 짓고 처음 정착한 가구가 14개 농가. 1887년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더많은 이주민이 정착하여 용정은 우리 민족의 터전으로 자리잡았다 한다.
지금도 용정시 인구의 66퍼센트는 우리 민족이라고 하니 용정이야말로 이방(異邦) 속의 아방(我邦)이라 할만하다. 해란강 용문교 다리밑 빨래터에 빨래하는 아낙네는 보나마나 우리 민족임이 분명하였다.
우리 민족과 관련지워진 연변에서의 일정 역시 너무 바빴다. 한만 국경인 도문(圖們)을 빠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오후 2시에 전용차로 용정을 출발하여 연길의 번화가인 광명거리를 차창으로나마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답게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는 한글 간판의 일색이라 한국에라도 온 착각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중국도문국안'(中國圖們國岸)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용정에서 전용차로 불과 2시간 거리에 두만강으로 경계지워진 한반도와 만주의 국경은 있었다. '도문강(圖們江)'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곧 두만강의 중국측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강가에 섰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사공은 이미 없었다. 무심한 해오라기만 강 위를 날고 있는데 한만 국경을 가로지른, 트럭 하나가 지나다닐 만한 오래된 교량 하나가 7,8백 미터 너비의 강폭을 가로질러 북한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교량의 절반을 갈라 중국쪽은 붉은색, 북한쪽은 푸른색으로 도색하여 국경을 구획하고 있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불과 몇백 미터만 건너가면 한반도 우리 조국이지만 건너갈 수없는 다리라고 생각하니 심경이 착잡해지기만 하였다. 어느 극성스런 한국 여행팀은 경비원의 안내를 받아 중국측 경계선이 되는 붉은색 표시부분의 끝까지 다리 위를 거닐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고들 있었지만 어쩐지 궁색스럽기만 하였다.
목전에 다가든 건너편 북한땅을 좀 더 자세히 촬영하기 위하여 비디오 카메라의 망원렌스를 최대한으로 끌어당겨 건물 전면에 게시된 김일성 초상화까지 담아내었다. 인적이 없는 6,7층짜리 백색 연립주택이 늘어선 뒤쪽 산언덕배기에는 '속도전'이라는 대형 선전문구가 새겨져 있어 눈을 거슬리었다. 중국측 국경관리건물인 도문국안(圖們國岸) 전망대 위에 휘날리는 붉은색 오성기(五星旗)와 어울려 사뭇 적의를 품고 있는 듯한 것은 순전히 나만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착오였던지 모르겠다.
국경을 가로지른 다리 위로는 간간이 짐을 실은 트럭들과 보따리를 머리에 인 북한 사람들이 건너오고 가고 하였다. 물자를 수송하고 장사차 오가는 모양이었다. 룸메이트인 K교수는 화폐 수집가이기도 하여 김일성 사진이 박혀 있는 북한 돈을 한국돈 천원을 주고 사길래 외국 여행중의 상품구매 취향도 골고루구나 싶었다.
인도교가 있는 두만강 위쪽 1킬로 상거의 철교 위를 지나 목단강 하얼빈 치치하르로 갈 법한 증기기관차의 한숨과도 같은 기적소리를 뒤로 하고 연길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또다시 만주벌판을 밤을 도와 달릴 밤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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