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유럽 각국을 주마간산격으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여행은 경물을 구경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大觀을 보아 氣를 조장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범속한 인간으로서 나는 호기심이란 맹목적인 충격에 따라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가는 방랑자적 입장에서 단 2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동양과는 다른 신선함을 느꼈고 놀라운 일에 대한 견문을 넓혔으며 새로운 도시를 보는 기쁨을 맛보고 고결한 예법을 목격한 일정이었다.
런던,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프랑크프루트, 하이델베르그, 바젤, 인터라켄,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로 여정이 이어진 버스 투어는 수박 겉핥기 식이긴 해도 여러 가지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여서 세계가 한 권의 책이었다면 고작 한 페이지를 넘겨본 셈이긴 해도 유럽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지는 소득은 있었다.
런던 남서쪽에 있는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고부터 영국인 기질의 관대한 무관심은 도리어 오만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하였다. 런던 관광을 위하여 지도를 펼쳤을 때 녹색을 띤 공원부분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넓은 것이 하이드 파크, 그들에게 있어 공원은 생활의 일부였다. 조깅을 하는 사람, 승마를 하는 남녀, 개를 산책시키는 우아한 부인, 일광욕을 하는 사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공원에 모였다.
버킹감 궁전의 유명한 위병 교대식을 보고 서울의 덕수궁에도 수문장 교대식이 있지 않느냐니까 영국 현지인과 결혼하여 이미 런던 사람이 다 되어버린 한국인 가이드가 피식 웃는다. 사람들이 붐비는 런던 중심부 피카디리 광장 비둘기와, 새빨간 2층 버스가 가득한 트라팔가 광장, 빅밴의 애칭을 지닌 시계탑으로 유명한 템스 강에 면해 있는 국회의사당은 웨스트민스트 다리에서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자주 묘사되는 런던탑, 그 탑 바로 앞의 템스 강에 걸려 있는 다리가 유명한 타워브리지였다. 그 상류쪽의 워털루브리지는 영화 '哀愁'로 인해 역시 애수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런던 관광의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방대한 소장품을 지닌 세계 최대의 박물관인 대영박물관.
고대 이집트, 고대 아시아,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동서 고금의 인류 문명 문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특히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갖고 돌아온 조각들, 세계 최고 미이라의 여러 유형을 손이 닿을 듯한 유리 진열장 너머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경이 그 자체였는데 그 귀중한 유물들을 캠코더로 사진을 찍거나 어루만지거나 해도 간섭하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하고 있어 경주 박물관이나 북경 이화원에서의 으름장을 놓던 일과는 대조가 되어 문화 유적을 인식하는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자기에게 좋다면 돌부처의 코도 베어가는 우리네 문화 수준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초고속 열차인 유로스타 편으로 도버해협을 건너 뛰어 파리의 북역 'Gare du Nord'에 도착, 역앞 길거리에 첫발을 내디디었을 때 놀라웠던 것은 불결함 지저분함이었다. 세느강 유람선 선착장 구석진 곳의 쓰레기도 마찬가지 인상을 던져 주었는데 밝은 양지쪽 배면의 어두운 그림자라고나 할까?
태양왕 루이 14세의 초호화 궁전 베르사유, 개선문, 샹제리제 거리, 콩고르트 광장 , 몽마르뜨 언덕, 방돔 광장, 노틀담 성당을 지나며, 미술을 전공하러 이곳에 유학 왔다가 주저앉게 되었다는 가이드는 청산유수격으로 설명을 늘어 놓는다.
에펠탑 꼭대기에 서면 서울의 4분의 1 규모의 파리는 한 눈에 조망되지만 그 문화의 깊이는 하루 아침에 알 수가 없었다.
브루셀, 암스테르담을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 아우토반에 접어들었을 때 벤츠 회사 제품의 전세버스는 서부 독일 훨쩍 트인 평야지대를 가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프랑크프루트에서 일박을 하고 하이델베르그 고성과 대학을 견학하고 스위스 바젤을 지나면서부터 세계의 자연 공원 스위스 알프스의 정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스위스를 관광하는 주된 목적지가 융프라우 요흐였던 만큼, 베른 지역의 고지대 산마을에서 일박을 하고 이 지역 관광의 거점인 인터라켄으로 향했을 때는 아침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4천 미터급 알프스와 그린델발트, 라우터브룬넨 등이 있는 스위스 최고의 관광지 베르너 오버란트 관광의 핵심 융프라우 지구로 향하는 마음은 툰호와 브리엔츠호를 지나면서 벌써 설레기 시작했다.
차창으로 바라보이는 알프스의 산들, 높은 벼랑에서는 하늘에서 쏟아붓는 듯한 물줄기가 폭포되어 쏟아지는가 하면 더 높은 곳에서는 얼음 폭포가 되어 수정처럼 빛나기도 한다.
인터라켄에서 한국인 지역 가이드를 만나 그린델발트로 향하는 오르막길의 차도 주변에는 한가로이 종을 울리며 풀을 뜯고 있는 소, 산 사이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민가, 그리고 그 옆에 피어 있는 색색의 꽃들이 알프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산의 표정을 읽게 하였다. 이미 그림엽서로 익숙해진 풍경들을 실제로 접하는 감탄이 저절로 일었다.
그린델발트에서 전세버스를 하차하여 클라이네샤이데크행 등산철도 WAB에 올랐다. 이미 100년 전에 개통하였다는 이 등산철도는 서너 너댓 차량의 객차를 달고 40도 이상의 경사길을 톱니바퀴식 궤도로 숨가쁘게 오르고 있었는데 신선이나 살았을 법한 태산의 산정을 오르는 문명의 괴물을 만들어 낸 마술같은 인간의 손재주를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느닷없는 한국말 안내방송이 있어 우리 일행은 응당 들어왔던 말이라 그러려니 했다가 이곳이 우리들의 언어권이 아닌 세계의 명산 알프스의 융프라우 요흐란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영어 독일어 일본어 방송에 이어, 한국어가 발음도 분명하게 튀어나왔음을 깨닫고 자긍심이 살아났지만 뒤집어 보면 관광객을 맞이하는 그네들의 치밀함에 놀라야 했을 것이었다. 보아하니 그 등산열차에는 유럽 관광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일본인 단체 관광객과 우리 일행이 동양인으로 함께 편승하고 있어 우리들의 관광을 위한 배려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네들의 관광상품 의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 낯선 나라에의 여행에는 무지에서 오는 막연한 공포심이 마음을 사로잡으며 젖어온 습관에 안도해 보았으면 하는 어떤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마련이어서 그런 심정에 젖어 있을 때 한글로 표기된 간판 하나 안내장 하나 동포와의 만남, 비록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투박한 한마디 우리말은 그립다 못해 눈물겨운 것이다.
가이드가 있긴 했지만 우리는 세계의 명산 융프라우 지구에서 우리말 안내방송을 들어가며 클라이네샤이데크에서 또다시 등산철도 JB로 갈아타고 3,454미터의 융프라우 요흐에 올랐다. 만년빙하 속 얼음 동굴을 지나고 전망대에 올랐을 때, 눈은 내려 한 여름의 설경이 꿈만 같았는데 그 태산의 정상 눈 속에 날아든 산까마귀는 어떤 영혼의 변신 강림이었던지.
융프라우 요흐에서 클라이네샤이데크로 되짚어 내려와 라우터브룬넨으로 향하는 등산철도 WAB를 갈아타고 나서야 고산병과 긴장감에서 풀려 일행은 그림같은 차창의 산꽃들에 감탄을 보냈다. 등산철도 열차가 베겐알프를 지나 알프스 계곡 중 가장 절경이라는 베르너 골짜기가 차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지점을 지나면서 일행 중 노래 잘하기로 유명한 K교수 사모님의 '아름다운 베르네'의 요들송이 열차 속을 울려 퍼졌을 때 우리 모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만큼 융프라우 요흐의 관광은 우리를 들뜨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런 심정이 든 것은 세계의 명산이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세계의 손님을 맞이하는 스위스인들의 치밀한 배려에 감동한 요소도 한몫을 했다고 생각된다.
김 재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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