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출입에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나선다는 것은 우리네 조상들의 기본적인 복장 예절이었다. 최소한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나 도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망건을 두른 위에 탕건을 쓰고 또 그 위에 갓을 써야 출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흥부전>의 가난한 흥부도 하다 못해 다 떨어진 갓이나마 쓰고 형님 집을 방문한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외출의 차림새가 규격화되어 문화적 통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라고 해서 규격화된 외출복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반드시 갖추어 입어야 할 복장도 따로 있지만, 적어도 의관을 정제하여 바깥 출입을 해야 할 당위성에서는 벗어난 셈이다. 무엇보다도 관(冠)에 해당하는 머리의 모자를 쓰지 않아도 상관 않는다는 것이 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나이가 60이 가까워지면서, 특히 겨울철에는 외출할 때의 기본 옷차림으로 외투와 모자만은 제대로 갖추어야 나이와 품위에 걸맞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복이면 두루마기가 외투로는 제격이지만 양복을 입어야 했으니 오버코트일 수밖에 없었고, 문제는 머리에 쓰는 모자였다. 전통의 모자에 갓이 있었지만 그것은 조선시대의 모자이고 감투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현대 감각에는 맞지 않는다. 양복 차림에 오버코트를 걸치고 쓸 수 있는 알맞은 모자가 중절모였다.
중절모는 꼭대기의 가운데가 접히고 챙이 둥글게 달린 서양식 모자로, 개화시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일제의 잔재가 의식되는 모자이지만, 근현대에 와서 한국에 정착된 가장 보편적인 남성용 정장 모자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잘못 골라 쓰다 보면 여러 가지 엉뚱한 이미지가 창출되어 곤혹을 치르게 마련이다. 머리 부분 꼭대기가 좁고 높으면서 챙이 위로 접혀 올라간 것이면 카우보이가 되기 십상이고, 검은 색에 좀 고급스런 디자인이면 영화에 자주 나오는 암흑가의 사나이가 되어 알 카포네로 오인되기가 쉽다.
아무튼 나는 모자로 인해 나의 현재의 품위나 내가 가진 이미지에 손상이 가지 않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중절모를 구했는데 일본식 고가품이었다. 진회색 캐시미어 오버코트에 그 모자를 쓰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면 모두들 돋보인다고 하여 내나름대로는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하였다. 남이 그러길 바라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차림새였으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모자, 그런 옷차림새의 반응이 문제였다.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50대 중반의 부녀자까지 자리를 양보한다. 공항 검색문을 들어서면 오버코트의 호주머니를 뒤지면서 모자까지 벗어 보란다. 코미디언 아무개에 심취한 어떤 교수는 그분의 어떤 모습으로 착각했단다. 식민지 시대 일본 사람의 압박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어떤 한글 학자는 유독 그 중절모자에 대하여 알레르기성 반응을 일으키던 것이었다. 모두들 인식상의 차이에서 오는 자기나름의 관념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컬하고도 코믹한 것이 I.M.F가 밀어닥쳤던 '98년의 일이다. 한보사건이 터지고 어떤 회장이 감옥에도 갇혀 있던 시절의 연말이 가까워진 저녁, 나는 그 예의 오버코트와 중절모자 차림으로 외출했다가 막 지하철 입구를 나서는 중이었다. 어느 기업체의 회장 아니면 사장 쯤이나 됨직한 점잖은 풍모에 점잖아야 할 나이의 낯모를 신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내 앞길을 가로막으며, "어! 한보의 정 회장 아니오?" 하는 것이었다. 그런 옷차림을 하고 거드럼 피웠던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이었던지 아니면 자기도 그런 부류이면서 나를 그런 부류로 보고 자조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술투정치고는 낯선 사람에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아! 그 사람은 지금 감옥에 있지 않소?" 하고 응수한 적이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유행이란 것은 차림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자기가 좋다고 생각한 차림이어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면 잘못 엉뚱한 오해를 받기가 십상이니 세상이 알아 주는 그 인간, 그 직장, 그 직위, 그 인품에 걸맞는 차림새를 차려 가는 것이 제격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싶지만, 그래도 나는 겨울철이면 에누리 없이 그 오버코트에 그 중절모자를 쓰고 곧잘 나들잇길에 나서곤 한다. (2003.2. 여강산고)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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