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헛기침 - 경해

如岡園 2006. 12. 18. 00:17

 "경해"라는 말이 있다. '가래(경)'와 '기침(해)'이란 두 한자가 어울려 된 낱말로 윗사람에게 뵙기를 청할 때, 자기가 있음을 알리는 '헛기침'이란 말이다. 요즈음 개념으로는 '인기척'이란 뜻 쯤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경해'라는 말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웃지 못할 옛날 어린 시절 시골 생활의 풍정(風情) 하나가 떠오르곤 한다. 예전 시골의 화장실이라는 게, 아랫채 후미진 곳에 거적때기나 허술한 판자로 출입하는 곳만을 가린 게 태반이었다. 요즈음 화장실을 출입하는 사람이면 그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노크를 해야겠지만 고작, 용변자의 모습만을 겨우 가리운 시골 화장실을 출입하는 입장이면, 가까이 가서 노크를 할 수가 없으니 천상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인기척에 상대편이 헛기침으로 맞받아치곤 하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웃어른을 찾아뵐 때도, 창호로 된 문전에서 뵙기를 청하는 헛기침이 제격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수렴청정(垂簾廳政)도 그런 문화에서 생겨난 것이고, 주렴발을 드리워 가리고 있으면서도 은밀히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지혜도 그런 데서 왔다.

 

 우리 문화의 정신적 공간 개념은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고,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다. 구조적으로는 열려 있지만 정신적 공간은 엄격히 닫아 놓고 있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열어 놓고 있으면서도 구조적으로 무언가를 가려 두어야 제격이었던 것이다. 발(주렴)의 문화가 생겨난 것도 그런 공간 개념의 기저에서 기인한 것이다.

 좋은 것이거나 궂은 것이거나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허물어뜨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화는 어차피 변해 가는 속성도 가지고 있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문화 역시 높은 문화의 영향 아래 낮은 문화가 따라가기 마련이다.

 문제는 문화에 대한 인식을 어디에다 기준을 두느냐에 있다. 우리 조상이 축적한 문화에는 우리의 생활 양식에 맞도록 개발 경작된 지혜가 있음을 감안할 때, 쉽게 허물어뜨리고 체질에도 맞지 않은 새로운 문화를 성급하게 모방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문화 그것은 언어의 조건이며 그 산물이다. 문화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가치도 약간 다르다. 그리하여 한국의 문화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밥을 먹는 도구만 두고 보더라도 서양식 스푼 혹은 포크와 우리의 숟가락 및 젓가락은 다르다. 주택 역시 우리는 완만한 곡선의 초가집 아니면 추녀가 드리운 기와지붕 온돌방에서  살아온 반면, 서양에서는 슬라브 지붕밑 침대위에서 살아왔다.

 

  과거를 부정하여 깔아뭉개고 변화와 개혁을 무조건 서두는 것이 발전의 기수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통을 무시하고 상식을 벗어난 기발한 개혁만을 지향하는 사람은 소아병적인 영웅심리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별난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이 대표자가 되는 사회는 미래가 불안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문화적인 요소를 잘못 건드려서는 큰일이다. 문화는 물이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바뀌어 가야 하고 , 또 응당 그렇기 마련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동서문화가 접근하며 절충을 해 가고 있다. 밥숟가락의 모습도 서양식 스푼과 입모양이 넓은 전통식 숟가락이 절충된 좁고도 깊은 모양새의 밥숟가락으로 변해 있지 않느냐.

 이제 우리의 전통문화만을 고수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화의 요인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전통문화를 버려서는 안되고 무조건 고수해서도 안된다. 세계의 조류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헛기침(경해)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켰던 일을, 이제는 노크나 또 다른 방법의 예고로, 대체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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